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벌귀족 (문단 편집) == 개요 == {{{+1 [[文]][[閥]][[貴]][[族]] / [[門]][[閥]][[貴]][[族]]}}} [[과거 시험]]을 통해서만 대를 이은 권력을 보장받을 수 있던 [[조선]]의 [[양반]]과는 달리, 과거에 더해서 [[음서]], [[공음전]]을 통해 부와 권력을 합법적으로 [[세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만 고려 문벌귀족들이 과거시험을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거 급제는 할 수 있으면 가능한 하려고 했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처럼 음서를 개무시하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음서보단 과거시험 급제자를 더 좋게 쳐줬다. 그렇게 시도해보고 시험을 누대에 걸쳐 통과하지 못하면 조선 양반은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고려 문벌귀족은 정 안 되겠으면 음서를 써서 세습 가능한 것이다.] 이들을 [[신라]]나 기타 외국의 귀족들처럼 '[[귀족]]'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양반과는 구분하는 것이다.[* 사실 귀족은 후대에 [[유럽]]의 귀족 이론과 용어를 빌려서 붙인 것이다. 고려시대에 귀족이란 말이 쓰인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시에 '[[세족]]' 또는 '[[관롱집단]]', '[[문벌]]' 등의 표현을 썼다. 그 성격도 서양권의 귀족과 완전히 1:1 대응은 되지 않는 단어지만 최대한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다.] 그중에서도 5품 이상 관료가 3대 이상 배출된 가문[* 일설에서는 2품 이상이라고 규정했으나, 그렇게 따지면 너무 범위가 줄어드는 문제가 있다. 실제 관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단계'''(즉 1급 집단, 2급 집단)라는 설도 있다.]의 귀족들을 말한다. 이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아직도 논쟁이 있다. 아래의 내용은 주로 귀족사회론의 주장으로, 이들은 고려를 신라의 관점에서 보아 귀족 중심의 폐쇄 사회로 본다.[* 물론 신라보다 그 폐쇄의 정도는 줄어들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정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체제라는 주장이다.] 귀족사회론이 통설에 가깝고 교과서 교육이나 일반적으로도 그 쪽으로 배우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관료사회론도 있는데, 이들은 고려를 조선의 관점에서 보면 [[음서]], [[공음전]] 등이 가진 세습적 기능은 과장되었고 사실은 비 문벌귀족에도 열려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유승원의 주장에 따르면 음서는 관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 공음전은 잠시 시행되었던 제도로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며 문벌 귀족도 약간의 이점만을 가진 집단이었다고 한다.[* 유승원(1997), '고려사회를 귀족사회로 보아야 할 것인가', 역사비평, 봄호.] 음서, 공음전에 대한 해석도 어떤 이론을 따르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일단은 모두 경험적 증거가 부족하기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상은 모두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