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선명 (문단 편집) === 비공식 자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성진희진경진님.png|width=100%]]}}} || || {{{-3 {{{#black '''왼쪽 위부터'''}}}}}} [br] {{{#black '''최선길, 김명희, 최순화[br]문성진, 문희진[* 사진 속 어린이이다.], 박사무엘'''}}} || ||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슬하 자녀''' || || 문성진 || 1946년 ~ || 최선길^^(1925년 ~ 2008년)^^ || 김동숙 || 1남 2녀 || || 문희진 || 1955년 ~ 1969 || 김명희^^(1930년 ~ 2020년)^^ || 이혜신^^(사후 영혼결혼)^^ || 요절해서 자녀 없음 || || 박사무엘 || 1966년 ~ || 최순화^^(1936년 ~)^^ || 불명 || 불명 || 최선길(崔先吉)(1925년 음력 3월 21일 ~ 2008년 양력 11월 16일)(1944년 결혼, 1957년 이혼)과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선길은 [[해주 최씨]]로,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觀舟面) 관삽동(觀揷洞)의 3대째 개신교를 독실하게 믿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오빠도 개신교 목사였다. 문선명 자서전에 따르면 문선명은 1942년 초, 기도 중 결혼할 때가 되었음을 계시받고, 중매를 잘 서는 이모에게 중매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43년 10월에 귀국하여 12월에 맞선을 보고 약혼을 했다. 그리고 1944년 5월 4일 결혼을 했다. 결혼 당시 문선명은 24세, 최선길은 19세였다. 신혼집은 문선명이 전에 하숙을 하던 서울 흑석동의 이기봉의 하숙집이었다. 이후 문선명은 아내와 생후 2개월 된 아들을 두고 1946년 6월 월북을 한다. 이후 6.25전쟁이 터지고 피란 내려온 문선명은 최선길과 아들을 부산에서 재회한다. 최선길은 문선명에게 "그놈의 교회 관두고 지금부터라도 같이 단란하게 살자. 교회야, 가정이야?"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나 문선명한테는 교회가 우선이었고, 부산에서도 매일같이 전도생활을 했다. 최선길은 이에 우리 이혼하자고 했고, 문선명은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최선길은 문선명의 교회에 찾아가서 자주 이혼 도장을 찍어달라고 깽판을 피웠다고 한다. 최선길이 이렇게까지 한 건 기독교인인 오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 문선명이 김명희라는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일본에 보냈다는 게 알려졌고, 문선명은 할 수 없이 1957년 1월 8일 협의이혼을 했다. 최선길은 이후 통일교와 연을 끊었으나, 이후 최선길, 최선길 오빠를 비롯한 최씨 일가 전체가 통일교로 개종하였다. 참고로 최선길은 1999년 '3억 6,000만쌍 제 1차 합동결혼식'에서 구약시대의 예언자 [[사무엘기|사무엘]]과 영혼결혼했다. 문선명 왈 최선길이 문선명을 반대하고 이혼만 안 했다면 최선길이 참어머니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선집 484-129) 최선길이 문선명을 반대한 건 결혼하고 몇 년 후부터이므로, 1944년의 결혼식은 참어머니가 되는 '성혼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최선길이 참어머니가 되는 성혼식은 이전부터 1960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 장남 문성진(文聖進)(1946년 4월 2일 ~ ) * 김동숙(金東淑)과[* 36가정 김원필(金元弼)-정달옥(鄭達玉) 가정의 딸.] 결혼 * 1남 문신일(文信一)(1976년생) * 구니토키 시오리(国時志織)[* 1,800가정 구니토키 아키히코(国時昭彦) 가정의 딸]와 결혼 * 1녀 신미(信美)(1977년생) * 이형진(李亨鎭)과 결혼. * 1남 순남(淳男)(2008년생) * 1녀 순옥(淳○)(2009년생) * 2녀 신숙(信淑)(1984년생) * 오오츠카 히로타카(大塚洪孝)[* 오오츠카 가츠미(大塚克己) 가정의 아들.]와 결혼 * 1녀 순미(淳美)(2010년생) 김명희(金明熙)(1930년 음력 10월 23일 ~ 2020년 양력 4월 1일)(결혼 안 함)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김명희는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1930년 음력 10월 23일에 태어났으며, [[언더우드]]계 장로교 선교사의 양딸이었다. 1947년 남하 후 1952년 [[연세대학교]]에 입학, 재학 중 숙모 양윤신(梁允信)의 권유로 1953년 9월 서울에서 문선명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산 영도에서 개최됐던 통일교 수련회에 참가하고, 1954년 1월 7일 통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954년 연세대학교 3학년이던 김명희와 문선명이 관계를 가져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한다. 현 부인 한학자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임신했다는 걸 생각하면... 김명희는 이후 연세대를 휴학하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 현 중구 신당동]의 세대문교회 등지에서 전도생활을 했다. 문선명 왈 김명희는 신약시대 마리아의 입장으로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듯이, 김명희도 아들 문희진과 일본으로 가서 일본을 개척하고 승리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문선명과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선집 037권-055쪽) 문선명은 김명희에게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오면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당시 임신 8개월이던 김명희는 문선명의 명으로 1955년 6월 24일 연세대 동창생이기도 한 오승택(吳昇澤)[* 일본에 가기 전 성화청년회(통일교 청년조직) 사업부장을 맡고 있었던 통일교 신자이다. 안창성(安昌成)(36가정) 당시 성화청년회 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1970년에 박상래(朴商來)의 권유로 통일교를 떠나, 김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의 서울 성북구 정릉3동의 '청수교회'(淸水敎會)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승택은 1975년 청수교회를 떠났다. 박상래 또한 1982년 8월 17일 탈퇴했다. 박상래도 본래 1954년 통일교에 입교했었다가 1957년 이스라엘수도원으로 개종했던 것이다.]이라는 보조인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출발 전 김명희는 문선명과 함께 [[샐비어]] 꽃이 피어있는 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명희는 밀항에 성공하여 [[나가사키현]] 와카마쓰(若松)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도쿄로 향했다. 그녀는 [[도쿄도]] [[메구로구]] 오오카야마(大岡山)의 사쿠라소(さくら荘)에서 8월 17일 문희진을[*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다케노부(中村竹信)] 낳았다. 김명희는[*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요시에(中村好江)] 아직 수교도 되지 않은 나라의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의사도 부르지 못하고 혼자 거처에서 문희진을 낳았다. 몇 개월 후 김명희는 문선명에게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문선명은 최봉춘이라는[* 일본 이름은 니시카와 마사루(西川勝)] 사람을 일본에 선교사로 밀항시켰다. 이 최봉춘이 바로 통일교 최초의 정식 해외 선교사이다. 그러나 최초로 통일교 선교를 위해 해외로 간 사람은 바로 김명희이다. 그러나 최봉춘이 김명희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아는 신도는 드물다. 최봉춘은 1958년 7월부터 지속적으로 밀항을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김명희와 그의 아들은 1958년 7~8월 경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들켜 나가사키의 오무라(大村) 입국자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시모노세키항을 거쳐 부산 다대포항을 통해 1959년 4월 1일 한국에 강제로 돌려보내졌다. 또한 그러던 중 최봉춘은 밀항에 성공하여 1959년 4월 하순 일본에 도착한다. 결국 그렇게 둘은 만나지 못했다. 문선명이 준 사명에 실패한 김명희는 문선명과 결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봉춘은 어찌 됐던 선교를 하러 왔으니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1959년 10월 2일 최봉춘은 도쿄 신주쿠에서 일본 통일교를 발족했다. 김명희는 이후로 독신생활을 했으며, 1999년 '3억6천만쌍 제 1차 합동결혼식' 때에 [[소크라테스]]와 [[영혼결혼식]]을 하였다. 참고로 문선명의 결혼, 즉 성혼식은 전부터 문선명이 40세가 되는 1960년으로 예정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명희와 결혼할 수 없게 되자 문선명은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신붓감을 새로 찾아야 했다. 그것이 한학자이다. * 장남 문희진(文喜進)(1955년 8월 17일 ~ 1969년 8월 1일) - 최선길과 결혼생활 중이던 때에 낳은 문선명의 [[사생아]]. 중학교 2학년이던 1969년 8월 1일, 하계개척전도를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는데 때마침 지나던 전신주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였다. 이후 1998년 6월 13일 이혜신(李惠信)과[* 72가정 이제희(李濟熙)-김인애(金仁愛) 가정의 딸.] 영혼결혼 함. 최순화(崔淳華)[* 崔淳花, 崔順華 등으로 표기한 블로그 글도 있으나, 집안 돌림자가 淳 자이기에 崔淳華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Annie Choi)(1936년~)(결혼 안 함)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성모(崔聖模) • 이득삼(李得三) 슬하의 딸. 최성모는 문선명의 전처 '최선길'의 삼촌이자[*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1 p.410] 신동아그룹의 창업주이다. 결국 최순화는 최선길의 사촌동생이 된다. 그녀의 남동생은 [[신동아그룹]]과 [[대한생명]]의 前 총수이자 [[63빌딩]]을 건설한 [[최순영(기업인)|최순영]](崔淳永). 언니는 최순실(崔淳實).[* 최순실게이트의 [[최순실]]이 아닌 동명이인.] 1955년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1학년이던 최순화는 [[이화여자대학교/사건사고#s-2|통일교인이란 이유로 이화여대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다른 대학교로 편입 및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화여대에서 퇴학당한 여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최순화가 있다. 일본어로 된 통일교 서적에는 崔淳嬅라고 적혀있다.[[http://furuta65.fc2web.com/001/syougairotei_3/002.html|#]]] 박사무엘 왈 문선명은 1964년에 서울 청파동 교회에서 최순화와 비공개 결혼식을 했으며, 본래 1967년 즈음 최순화와 성혼식을 하여 최순화를 참어머니로 세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1965년 당시 미국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 중이던 최순화는 워싱턴 D.C에서 문선명과 성관계를 가져 박사무엘을 임신했다. 최순화는 비록 임신까지 했으나 한학자에 대한 동정심이 들어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은 한학자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냐. 한학자의 가능성을 믿어달라."며 스스로 '참어머니' 자리에 오르길 거부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박사무엘이 문선명의 혼외자식이란 것은 사실로 보인다.[[https://sundayjournalusa.com/2016/01/10/박보희-미국법원-증언통해-충격고백/|#]][[https://howwelldoyouknowyourmoon.tumblr.com/post/125275541470/i-am-dedicating-this-video-to-richard-hazel|#]][[https://www.motherjones.com/politics/2013/12/reverend-moon-unification-church-washington-times-secret-son/|#]] * 장남 박사무엘(Samuel Park)(1966년 1월 28일 ~) - 문선명이 한학자와 결혼생활 중이던 때에 낳은 문선명의 [[사생아]]. 1966년 1월 28일 미국 워싱턴D.C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문선명의 오른팔인 [[박보희]]에게 입양되었다. 그래서 박보희의 성을 따라 박씨인 것이다. 박사무엘은 1979년 13세 나이에 자신이 양아들이었으며 친부모는 문선명과 최순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순화는 이후 본인이 박사무엘을 양육하게 해달라며 그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박보희는 이미 자기 자식이라며 거부했다. 박사무엘은 젊을 때까지만 해도 통일교를 믿었고, 언젠가 문선명이 친부로서 본인에게 조금의 대화라도 해주고 문선명과 화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십 년이 지나도 그런 게 전혀 없자 문선명에 대한 믿음이 깨졌다고. 1999년 8월 15일 미국 CBS에서 방송된 홍난숙의 다큐멘터리 인터뷰 영상에서 문선명의 4녀 문은진이 출연하여 말한, 문선명의 혼외자식 1명이 바로 이 박사무엘이다.[[https://youtu.be/zIqZklMi8WE|8:45]] 문은진은 영상에서 그를 새미(Sammy)라고 표현했다. 영미권에서 새미는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별칭이다. 즉 한학자의 자녀들도 박사무엘이 문선명의 혼외자식이란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단 것이다. 박보희는 최순화와 박사무엘과 1999년 12월에 박사무엘이 문선명의 사생아, 즉 문은진이 말한 새미라는 것을 비밀로 한다는 비밀 합의서를 작성했다. 최순화와 박사무엘은 그 대가로 150만 달러를 받았다. 또한 문선명의 유산 상속에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추후에 2,000만 달러를 준다는 합의를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박보희가 2,000만 달러를 주지 않아 최순화와 박사무엘은 박보희에게 소송을 걸었다. 2010년 7월 26일 미국 [[애리조나]] 주 마리코파카운티(Maricopa County) 법원(상사중재원)에서 있었던 재판에서 박보희의 논조는 문선명의 아들임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왜 비밀을 말해서 합의를 안 지키냐는 것이었다. 그 재판에서 박보희는 "박사무엘은 미혼인 최순화가 낳은 자식이며, 나는 박사무엘의 친부가 아니다"라는 진술도 하였다. 박사무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냐는 판사의 질문에 "나는 정확히 모른다."라고 진술했다. 최순화가 문선명과 성혼식을 치르고 참어머니가 됐다면 박사무엘의 이름은 문경진(文慶進)이었을 것이다. 문선명이 최순화에게 친필 편지로 《외로이 걸어가는 스승의 마음에 빛이 되어다우. 보희 부처(夫妻)한테 伝(전)하여 慶 • 姸 字를 가운데 둠. 항렬 딸아(따라) 한다고 알고 伝하여라. 지금 방콕 나나호텔.》 이라며 아기가 남자면 경(慶), 여자면 연(姸) 자를 붙여 문 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 박사무엘의 한국 이름은 박진'''경'''(朴○慶)이다. 박사무엘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문학 학사와 금융경영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