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선명 (문단 편집) === 유소년기 === 1920년 1월 6일[* 양력 2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德達面) 덕성동(德星洞)의 '문촌(文村)'으로 불리던 [[남평 문씨]] 의안공파 집성촌에서 문경유(文慶裕)와 김경계(金慶繼) 슬하의 7남 6녀 중 다섯째(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대대로 유교집안이었으나, 열 살 무렵, 그의 형인 장남 문용수(文龍壽)와 누나인 3녀 문효순(文孝淳)이 정신질환을 앓아 치유를 위하여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고, 정주군 덕언면 덕흥동의 덕흥장로교회를 다니며,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이후에 교회 덕분인지는 모르나 둘의 정신질환은 완치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지방 조선인이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의 고등학교에 유학까지 했다는 건, 머리도 머리지만 나름 부유층이었음을 의미한다. 문선명이 자서전에서 밝히길, 어릴 때 굶주린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가족들이 항상 밥을 거저 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작은할아버지 [[문윤국]]이 독립운동가로서 집안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자 집안의 가세가 점점 기울어갔다. 열여섯 살의 문선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 정주의 묘두산(猫頭山)에 올라 기도하던 중 문선명 앞에 [[예수]]가 나타나, 예수가 문선명에게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고 말했다고. 문선명은 이 경험으로 자신이 메시아로서 태어난 존재임을 자각했다고 한다. 문선명은 그 경험 이후 계속 고뇌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뇌를 담아 16살 때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https://blog.daum.net/seoungwhapc/105|#]] 그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세 곳의 서당을 다녔다.[* 문형청의 덕흥동 몰음마을 서당 → 김창제와 정신택의 덕성동 장산박촌 서당 → 박기호의 상사리 문촌 서당. 문촌 서당에는 중간에 문형청이 들어와 가르쳤다.] 1934년, 15살 때 [[이승훈(1864)|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사립 [[오산학교|오산보통학교]][* 현재 초등학교에 해당된다.] 3학년에 편입하였다가, 1935년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그런데 1938년 3월 25일,[* 일본은 교육과정 상 3월에 졸업하고 4월에 입학하는지라 3월 25일 졸업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선 3월 초에 졸업, 4월 초에 입학이 일반적이다.] 문선명이 자원하여 그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소견발표를 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경찰서장, 군수, 면장 등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라."며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교사 개개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설을 '''일본어로''' 했다. 이 때문에 그 이후부터 문선명은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