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선명 (문단 편집) === 북한에서의 활동 === 문선명은 이스라엘 수도원에 있는 동안 "평양의 어떤 정신 나간 할머니가 자기가 하나님의 부인이라고 한다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문선명은 평양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문선명은 "평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수도원을 나온 문선명은 당시 소련군정의 평양으로 갔다. 당시 평양은 [[http://m.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71|동방의 예루살렘]][* 여담으로 대구는 동방의 모스크바였다. 정교회가 흥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공산주의 색이 가장 짙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https://m.facebook.com/sanhatoday/photos/a.284601761727946/360524394135682/?type=3|#]]]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 뿌리가 깊은 곳'''이었다.'''[* 당연히 지금은 북한의 종교 탄압으로 인해 거의 없어졌다.] 문선명은 1946년 6월 6일 평양에 도착하여 재림주 타이틀을 걸고 우선 길거리 전도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신도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러던 중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허호빈의 복중교와 유사한 단체의 지도자이며, 이승만의 첩자"라며 문선명을 북한 [[사회안전성|안전부]]에 고발했다. 그리하여 8월 11일 문선명은 안전부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었다. 문선명은 유동보안서에서 고문당하고 평양 대동보안서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11월 21일에 무죄로 풀려났다. 대동보안서에서 풀려난 후, 문선명은 1947년 자신이 '하나님의 부인'이라 주장하는 평양의 박을룡(朴乙龍)에게로[* 그녀의 이름은 을룡, 월령, 월례, 운녀, 운내, 태영 등 자료 상 차이가 많다. 통일교 일본어 서적에는 朴乙龍이라는 한자로 표기한다.(原理に関するみ言の証) 통일교에서는 주로 박을룡으로, 기독교에서는 주로 박태영으로 불린다.[[https://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22|#]] 1890년생. 당시 57세. 남편은 [[청주 한씨]]로, 슬하에 10남매가 있었으며, 그 중 박을룡이 25세 때 평양에서 낳은 '한인하'가 있다. 그 한인하가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아내이다. 즉 박을룡은 박흥식의 장모인 것이다.] 갔다. 문선명은 박을룡의 옆집으로 이사갔고, 40일간 박을룡의 집을 왕래하며 김백문 때처럼 봉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을룡이 문선명을 "하나님의 종(從)의 종,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양자, 하나님의 서자, 하나님의 아들, 하늘나라의 총리대신(總理大臣), 예수님, 하나님의 대상실체"라며 총 8번을 문선명을 증거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문선명이 박을룡에게 "그럼 이제부터 나한테 경배하고, 당신이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박을룡은 이를 거부하며, 되려 문선명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렇게 문선명은 박을룡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전도생활로 돌아갔다. 문선명은 이 평양 전도 활동 시절에 이름을 용명(龍明)에서 선명(鮮明)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던 중 또 다시 83명의 기존 기독교 목사들이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부녀자의 재산을 갈취하며, 이승만의 스파이다."라며[* 이와 달리 통일교를 탈퇴한 초기 신자 박정화(朴正華)는 문선명이 평양에서 유부녀 김종화(金鍾和)와 결혼식을 올리고 동거하다가 남편 정명선(鄭明先)에게 신고당하여 내무서에 잡혀간 거라고 주장했다.[[https://tmblr.co/ZuT9Hy24fYgTo|#]] 근데 이후에 박정화가 허구였다고 밝힌 건 함정.[[https://youtu.be/ZPnGMG8sLcc|#]]] 1948년 2월 22일, 또다시 평양내무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4월 7일 공판이 열려 '사회질서문란죄'로 5년형을 언도받아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5월 20일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되어 암모니아 비료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다가, 2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UN군의 폭격으로 감옥이 무너져 탈출하였다. 흥남 감옥에서도 12명 가량을 전도했다고 한다. 몇몇의 옥중 제자들과 문선명은 전쟁통에도 평양에 다시 가서 신도들과 같이 남하하려 했다. 그러나 20여 명의 신도들은 문선명이 감옥을 갔다온 사이 신앙이 사라져 문선명이 보낸 편지를 그대로 반송하고 문선명을 쌩깠다. 문선명과 만나게 된 나머지 소수의 신도들은 어찌저찌 사정으로 같이 남하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김원필(金元弼)과 박정화(朴正華), 이 2명만이 문선명을 따랐다.[* 다른 북한 신도들도 같이 남하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승도, 옥세현 등 북한 신도들은 남하 이후 문선명과 부산 등에서 재회한 것이다.] 이리하여 3명이 자전거 하나만 갖고 부산까지 같이 남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