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승훈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학창 시절에는 잠깐동안 씨름선수로 활동하다가 야구선수로 전향했다. 영흥고등학교[*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야구부가 창단되었으나 [[2003년]]에 해체되었다. [[KIA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 등에서 활동한 [[최향남]], [[롯데 자이언츠|롯데]]의 [[박건우(1985)|박건우]], KBO 심판 [[추평호]] 등이 이 고등학교 출신이다.]와 [[계명대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2차 3순위로 지명받아 계약금 1천만 원에 연봉 1,200만 원으로 계약하여 선수로 뛰게 된다. 주 포지션은 내야수로 1루수였지만, 당시 해태에는 [[김성한]]이라는 걸출한 [[프랜차이즈 선수]]가 [[1루수]]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때문에 1루수보다는 [[지명타자]]나 대타로 주로 출전하였다. 당시 시즌 초에는 지명타자 자리를 놓고 [[박철우(야구)|박철우]]와 경쟁을 했으나, 이 해에 박철우가 시즌 타율 3위(0.318)·홈런 5위(13개)·장타율 3위(0.482) 등을 기록하고 지명타자 부문에서 [[KBO 골든글러브|골든글러브]]까지 수여하는 등 두각을 나타낸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 문승훈은 지명타자 경쟁에서 밀려난 듯하다.[* 사실 1989년 당시에는 [[김성한]]마저 1루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여하면서 5년 연속으로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홈런 1위(26개)·승리타점 1위(15개)·득점 1위(93개)·장타율 1위(0.512)에 32도루로 20홈런-20도루까지 기록했던 엄청난 시즌을 보냈다.] 다만, 그 해에 주로 대타로 58경기 100타수 28안타 2홈런 15타점 14득점, 타율 0.280이라는 성적을 내면서 신인치고 노림수가 강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해부터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결국 1992년에 1군에 단 한 경기 출장한 것을 마지막으로 선수를 은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