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재인/일생 (문단 편집) === 대학 시절, 군 복무 및 [[사법시험]] === 대학입시에 낙방한 후 재수를 했는데, 1971년 종로학원[* 당시에 종로학원이 좋은 학원이기는 했지만 아직 초창기여서 전성기인 90년대 때의 종로학원과는 양과 질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양영학원이 최고의 명문 재수학원으로 꼽혔다. 다만 양영학원 대신 장학금을 노리고 종로학원에 진학했을 수 있다. 다만 종로학원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인 80~90년대 이 학원을 다닌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종로학원에는 장학금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대 수석을 해도 학원비 면제 등의 혜택은 없었다고.] 진입 시험에서 1등을 하면서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지만, 재수 이후에도 1972년 입시에서 [[서울대학교]]에 낙방하고, 후기로 [[경희대학교/학부/법과대학|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문과 수석을 차지하면서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보통 당시 후기 모집 대학 중 최고 명문대는 문과에 [[성균관대학교]], 이과에 [[한양대학교]]가 꼽혔다. 보통 전기에 서울대에 떨어지면 후기에 성균관대 법대 등을 지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유명 법조인 혹은 법조인 출신 중 성대 출신이 많이 보이는 이유다. 대표적으로 [[황교안]]이 있다.] 문재인은 특이하게 [[경희대학교]]를 선택했다. 4년 장학금도 이유였겠지만 그보다도 설립자 [[조영식]]이 문재인의 아버지처럼 같은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문재인 대학생 시절.jpg|width=100%]]}}}|| || 문재인의 대학생 시절. 훗날 아내가 되는 김정숙과 함께. || 경희대에 입학하면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훗날 아내가 되는 [[김정숙]]을 만났다. 학교 축제 파트너로 처음 만났는데, 김 여사가 [[알랭 들롱]] 닮은 사람을 소개 시켜준다는 친구 오빠 말을 듣고 혹해서 만나게 되었다고. 그런데 첫 인상이 상당히 촌스러워서(...) 김 여사가 실망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오고 가다 만나면 인사하는 사이, 지금으로 치면 썸 타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위를 이끌던 중 [[페퍼포그]]에서 발사한 응축된 최루가스를 직격으로 맞아 기절했는데 이때 [[나이팅게일 효과|김 여사가 직접 간호해주면서 사이가 깊어졌다.]] 쓰러져 있다가 눈을 떠보니 아내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고. 훗날 《[[문재인의 운명]]》에서, 대학 저학년 때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 논문(미국을 비판하면서 월남의 패망을 예견했는데 예상이 맞았다는 내용)을 [[창작과 비평|창비]]에서 읽고서 [[반미|'진실의 승리에' 희열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세간에는 '문재인이 월남이 패망하는 모습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라고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https://news.mt.co.kr/mtview.php?no=2018110714427675380|#]] 3학년 재학 시절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문재인은 [[유신 헌법]] 반대 시위를 하면서 사법 고시를 준비하던 법학과 동기들에게도 열심히 시위 동참을 호소했는데, 법대 동기였던 [[고조흥]]이 "우리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며 쫓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치른 '''사시 1차 합격자는 고시반에서 공부 안 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문재인 혼자 뿐'''이었다는 반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경희대의 전설이 된다.[* 지금의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이 법학과이던 시절부터 내려오던 3대 전설 중 하나라고 한다.] 훗날 고조흥은 문재인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먼저 [[검사(법조인)|검사]] 등 법조계 경력을 쌓기 시작하면서 후에 [[한나라당]] 후보로 재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111151816411#csidx454b51f4da6e3ecbb43166e0f4d5931|*]] 국회의원이던 시절에, 공직 채용 시험 때 군가산점제를 주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었다. [* 2007년 7월 1일에 군가산점제에 대해서 KBS 생방송 심야토론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정작 고조흥은 크게 한 마디 못 하고 인지도가 공기였던 반면에, 오히려 문재인의 후배였던 전원책이 선전했다. [[전원책]]은 이 날 여러 직설화법을 구사했는데, 이게 바로 '''전거성 어록의 시초이기도 하다.'''] [[경희대학교]] 4학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당시 총학생회장은 [[한나라당]] 부총재를 지냈던 [[강삼재]] 전 의원이었다. 집회 당일 경찰의 불심검문을 따돌리고 학교에 늦게 도착해 학생들을 모아놓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게 되자, 선언문을 작성하여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문재인이 총대를 맨 것이다.], [[10월 유신|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지만[* 참고로 이 판사는 시국사건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는 이유로, 얼마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후술되어 있지만, 재밌게도 대표적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 역시 문재인 대통령과 경희대 법대 동문이라는 사실이 썰전에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보다 무려 3년 후배라고. 전원책은 "문재인을 그 시절에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군에 입대했는데, 육군 [[제39보병사단]] 신병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은 뒤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병]]으로 차출되어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제3특전대대 대대본부 작전과 교육병으로 [[http://www.tipmania.com/files/attach/images/438/920/025/news_1308117849_2173_1.jpg|복무하였다]]. 이때 사령관이 [[정병주]] 장군[* 항목에 좀 더 자세히 기술돼 있는데,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 때 [[장태완]] 장군과 더불어 맞서서 같이 싸웠던 몇 안 되는 강직한 장군이었다.], 여단장이 [[전두환]], 대대장이 [[장세동]]이었는데 훗날 일어나는 [[12.12 군사반란]]에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들 밑에서 일반 사병으로 복무했던 문재인의 미래를 돌이켜 보면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파일:특전사 문재인.jpg]] 항간에서는 문재인이 대대본부 작전과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한 거니까 꿀을 빤 거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육군특수전사령부]]에선 [[장교]], [[부사관]]뿐만 아니라 특전병들 중 특전대대에 배치된 일부 인원은 여러 훈련들을 모두 똑같이 받았고, 특히 특전여단들을 계속 새로 창설하면서 전체 특전사 인원의 대폭 증가가 이루어졌던 1970년대 중반경부터는 특전병이 전투인원으로 편제되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병 복무기간은 3년으로 매우 길어서 실제 작전팀에 편제해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 특전부사관들의 의무복무기간은 4년이다.] 문재인도 팀 소속은 아니었지만, 대대본부에 근무하며 기본적인 훈련을 받았다. 특전사에서 주특기가 폭파였고, 심지어 수중침투훈련인 스쿠버 훈련까지 자원해서 받았다. 참고로, 현재 특전사에서 폭파 주특기는 오직 간부만 가능한 주특기다. 전투 지원 및 행정 업무만 하는 지금의 [[특전병]]도 특수전 훈련이 아닌 다른 훈련들(공수 훈련 등)은 받는다. 물론, 특전사의 주력인 특전사 간부[* 특전장교 및 특전부사관]들보다는 훨씬 수월한 것은 맞다. 그런데, 문재인은 1970년대에 특전병으로 복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장교나 부사관으로 군복무를 한 사람들에게 군복무한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의 군복무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간부건 병사건 훈련 똑같이 받고 지내서 간부들과 병사들 간의 간극, 다시 말해, [[우리의 주적은 간부]]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 시기에 대학생은 절반이 군면제, 나머지 절반은 방위, 나머지는 군대였던 1970년대였고, 군기가 엄청 빡셌던 건 말할 것도 없다. 뭣보다 유신 시대였던 지라, 대통령을 비판하기라도 하는 순간 예비군이라도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게 당연지사로 여겨지던 시대에서 꿀을 빨았다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선진병영이고 뭐고 없었던 시절이다.] 1976년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고급인명구조 교육 수료, 1977년 대대 스쿠바 교육 이수[* 참고로 특전사의 스쿠바 교육은 특수전사령부에서 직접 시행하는 사령부 해척조교육과, 대대 해상훈련 기간에 각 특전대대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축약형 교육인 대대 해척조교육이 있는데 [[문재인]]은 후자의 교육을 받은 것. 아무튼 문재인은 병인데도 자원해서 교육 받았다.], 자대 작전과 [[행정병]] 근무 시''' 48회의 강하훈련 '''등의 훈련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함께 복무한 후임의 이야기에 따르면 강하훈련을 배정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먼저 뛰고 넣어야' 불만을 적게 들어서 강하횟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으며, 강하를 즐겼던 문재인은 동료 행정병들 대신 뛰어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횟수는 월계 공수휘장에 해당할 정도인데, 이는 복무기간이 짧은 현재의 특전병들 사이에서는 매우 드문 기록이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96658|출처]]) [[파일:고급인명구조원.jpg]] 특전사 시절, 고급인명구조원 강습을 수료해 받은 수료증. [[대한적십자사]]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다. 군 복무 중에는 당시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사령관이었던 [[정병주]] 장군과 여단장이었던 [[전두환]]으로부터 2차례의 최우수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문재인과 같은 부대에서 교육장교로 있었던 노창남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문재인이 [[이등병]]이었던 시절 폭파 과정 훈련에서 최우수자로 선정됐는데,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는 [[장교]], [[부사관]] 등 직업 군인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이 성적 우수자로 선발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반 사병이, 그것도 가장 낮은 계급의 [[이등병]]이 성적 최우수자로 상을 받는 일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http://blog.naver.com/changnam6950/220937626700|#]] 이렇게 군 생활을 모범적으로 잘했기 때문에, 전역할 때 간부들이 "군대에 말뚝을 박으라"면서 강하게 권유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당시 쌍팔년도 군대 시절에는 대학진학률도 높지 않았고 군 생활도 힘들었기 때문에, 군 생활을 잘하는 병사에게 간부들이 군입대를 권유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현재 상사, 원사들 중에는 군 복무 중에 한 번 사고쳤다가 대대장이 "영창 갈래? 말뚝 박을래?" 해서 말뚝 박은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고 한다.] 문재인이 특전사 복무 중이던 [[1976년]] 8월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보복작전팀으로 문재인이 복무하던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이 투입되었다. 다만, 일부 나도는 소문과는 달리 문재인은 직접 보복작전을 하던 '현장팀'이 아니라, 부대에서 현장의 작전 진행상황을 수집/보고/감독하던 '작전상황팀' 소속이었다.[[https://twitter.com/motheryyy/status/843625834862661632|#]](판문점의 보복 작전 현장에 직접 투입된 것은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장교'와 '부사관'들이었다.) 이러한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복무 경력과 일부 정치인들의 [[병역기피|병역 비리]] 의혹이 대비되면서, 군 복무가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되려 메리트로 작용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 되었다. 특히 2016년 10월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회고록 파문이 터지자, 일부 보수세력들은 문재인을 향해 색깔론 공세를 펼쳤는데, 문재인은 이를 두고 '''"군대도 안 갔다온 사람들이 걸핏하면 종북 타령이냐?"'''라면서 국가안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보수 진영에서는 정작 군 복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꼬집기도 했다.[[http://www.nocutnews.co.kr/news/4670725#csidxed5a36516de46e7b307298c8ca47808|#]] 당시 그가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예하 제3대대에 배치받았을 때 '시위하다 온 애', '교도소에 있다 온 놈'이라는 전력 때문에 대대본부 예하의 각 부서에선 그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아직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러자, 대대 인사과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몰랐던 작전과 교육계한테 "똑똑한 놈이 새로 왔다"며 설득하여, 대대 본부 작전과에 문재인을 배치시켰다. 배치 받은 후에야 다른 장교들에게 문재인 신병이 '시위하다 온 애'라는 사실을 들은 교육장교 노창남 당시 [[중위]]는 다음 날 인사과장에게 항의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https://blog.naver.com/changnam6950/220945567006|노창남 예비역 대령의 회고문]][* 이를 두고 사람들은 애국심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시위를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국심이 있기 때문에 군복무 당시에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문재인이 속해있던 제3특전대대 본부 작전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노창남 예비역 [[대령]]은 2012년 [[18대 대선]] 당시에 문재인과 같이 군 복무했던 사람들을 비롯해 문재인을 지지하는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출신 700여 명을 모아 '문재인과 특전사 전우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http://news.joins.com/article/10118414|#]] 그리고 노 대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새 당대표를 뽑는 2.8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에도 문재인 지지를 호소하는 글을 [[새정치민주연합]] 대의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074980555944403&id=100002974057550|#]] 군시절 생활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장교, 부사관, 선후임 동기 모두 입을 모아 문재인은 한번도 후임을 때린적이 없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게 운명인데 우리는 후임을 때리지 말자"고 동기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선임이 문재인을 빠따로 치고 "이제 네가 후임들을 때리라"고 가버렸는데[* 일명 줄빠따], 문재인은 자기만 맞고 한번도 후임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때려야 할 때면 소리만 크게 나도록 엎드려 뻗쳐를 시킨 다음 군화 밑바닥을 빠따로 쳤다고 한다. 그 뒤 후임들에게는 구타 악습이 없어졌다고 한다.[[https://youtu.be/loj_Gxf2eI8|#1]] [[https://youtu.be/gm28Ooiks_w|#2]] 1978년에 전역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와서, 진로 문제를 고민하던 중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신이 잘되는 모습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든 문재인은 이를 계기로 [[사법시험]]에 매달리기로 결심하고,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대흥사]] 암자로 가서 공부에 몰두했다.[* [[송영길(정치인)|송영길]] 의원 말에 따르면 [[대흥사]]로 들어갔을 때, 주민등록상 주소를 [[부산광역시]]에서 대흥사가 있는 [[해남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사법고시 와중에도 [[예비군훈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였다고.[[http://v.media.daum.net/v/20170328081603953|#]]] 그다음해 1979년 [[사법시험]]에 2번째로 1차 합격하였다. 단, 준비 소홀로 2차는 다음 해로 목표를 정했다. 그런데 그때 [[부마항쟁]]이 시작돼, 다음해 80년에는 학교와 복학 논의가 시작되면서 뜻하지 않게 복학생 대표가 되었다. 1980년 복학하면서 4월 학내 시위 와중에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치렀을 무렵,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5월 17일 24시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발표]]하고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대학생 등 반정부 인사들이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면서 마구잡이로 구속했다. 그래서 문재인도 5월 17일 저녁 [[강화도]] 예비 처가에 다녀오는 길에 잡혀 또 구속됐다.[* 법대생답게 사복경찰들에게 "영장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울 때라 경찰들이 "영장은 무슨 영장? [[계엄령]] 떨어졌어!"하고 잡아갔다고.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5.18 민주화운동|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이런 사유로 [[5.18|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실제로 [[국가유공자]] 자격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http://blog.naver.com/ljk2013?Redirect=Log&logNo=220712532698|#]]''' 구속된 지 1달이 지나는 중 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2차 합격했다.[* 3차는 면접이였는데 '별일' 없으면 합격하는 요식행위였다. 단, 문재인의 경우가 그 '별일'에 해당되는 케이스였다.] 보통은 1차 합격을 하면 2차 시험을 위해 총력을 다해 매달리는데, 문재인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도 사법시험 공부까지 병행해서 합격한 것이다. 2차 합격 소식을 당시 여자친구였던 [[김정숙]] 여사가 직접 유치장으로 면회를 와서 알려줬다고 한다.[* [[문재인]]은 막판 2달은 시위하느라 아예 공부를 못 했기 때문에 떨어졌을 거라 포기하고 있었지만, [[김정숙]]이 혹시나 해서 합격자 벽보를 보러 갔다가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대학 관계자들이 면회를 와서 합격 소식을 전하자, 구치소 직원들과 안기부 직원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고(...) 한다. 계속 반말을 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문재인을 보고 "[[영감]]님"[* [[검사(법조인)|검사]]에게 쓰던 호칭. 다만 정중한 호칭은 아니었다. 대우는 해 줘야 되는데, 아니꼬울때 부르는 호칭.물론 그 전까지 일과 법대생에 불과했다면 충분히 존칭이라고 불리울 수는 있다.사법시험이 만만한 것도 아니고.]이라고 부르며, 유치장 밖으로는 못 나가니까 학교 관계자나 면회객을 유치장 안에 들어가게 해서 축하주를 마시게도 해줬다고 한다. 그 해 [[경희대학교]] 출신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2명이라[* 80년까지는 사시 합격 인원이 100명 선이었다. 참고로 그 전에는 더 적었다. 합격인원이 70명(!)밖에 안 되던 시절도 있었으며, [[노무현]]이 바로 이 시기에 합격한 사람이다. 합격자 중 유일한 고졸이기도 했다.] 다급해진 대학 측은 총력을 기울여 구명 노력을 펼쳐서, 며칠 후 석방되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장이 육사 1기 출신 [[김점곤]] 교수였다. [[6.25 전쟁]] 때 [[평양시]]에 제일 먼저 진입한 연대장으로 기록돼 있는 인물이다. 그가 중대장일 때 육사 2기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점곤 중대장 밑에서(!) 소대장을 했다고 한다. 그가 계엄사 쪽으로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기소 전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후 3차 면접 직전에 [[안기부]]에서 그를 호텔로 불러 "지금도 생각이 그때와 같은가?" 라고 사실상의 전향 의사를 타진했지만[* 운동권을 하다가 [[사법시험]] 합격 후 출세를 위해 군사 독재 정권 편으로 전향을 한 법조인들이 좀 있다. 5공 치하에서 고문 의혹을 받고 있는 [[정형근]] 전 의원도 한때는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이었고, 시위를 여러 차례 주동했다가 사시 합격 이후 공안검사로 변신했으며, [[박근혜 탄핵]] 당시 박근혜 측에 선 [[이경재(법조인)]] 변호사도 마찬가지 테크를 타서 공안검사를 했다.] 합격 취소를 각오하고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훗날 [[썰전]]에서 이 3차 면접 때 "[[안기부]]로부터 전향 요구를 받았을 때,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그 손을 덥석 잡아버리자니 너무도 굴욕적으로 느껴져서 거부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나와서 후회했다고 한다. 사실 [[사법시험]] 합격자가 귀한 [[경희대학교]]의 구명 노력과 당시 [[전두환]] 정권의 일시적인 유화책 실시라는 행운이 겹쳐 훗날 불합격이라는 불행은 결과적으로 면했지만, 당시로선 소신을 지키려다 몇 년 간의 공부를 도로아미타불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셈이었던지라 후회하는 마음이 든 것도 인간적으로 이해가 갈 만한 부분이 아닐는지. 다행히 그해에는 3차 면접에서 아무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 다음해부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3차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전두환 집권기 내내 그랬던 건 아니고 81년~82년 3차 시험 당시만 해당되고 그 이후에는 예전처럼 시국관련자여도 합격 시켜주긴 했다. 자세한 건 [[사법시험 면접 탈락 사건]]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