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제(남진) (문단 편집) === 치세 === [[영정]] 3년([[559년]]) [[6월]], 진패선이 사망하자 진천은 [[건업|건강]]으로 소환되어 황제 옹립을 의논했다. 장태후는 "선제의 여섯 아들이 모두 [[요절]]하거나 [[서위]]의 [[포로]]로 잡혀 [[시안|장안]]에 있으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소."[* 진패선의 다섯 아들은 모두 요절하고, 막내 아들 [[진창]]은 서위군이 [[강릉]]을 함락할 때 포로로 붙들려 장안에 있었다.]라며 결정을 못 내렸다. 이에 [[예주|남예주]] [[자사(관직)|자사]] 후안도가 "지금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먼 곳을 생각하겠소? 임천왕은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모두가 받들어 모셔야 할 분이오. 이 일에 응하지 않는 자는 베어 버릴 것이오."라며 칼을 뽑아 전 위로 올라가 태후를 [[협박]]하여 [[옥새]]를 바치고 명령을 내리게 했다. 그래서 진천이 건강 태극전에서 즉위했다. 천가 원년([[560년]]), 우문씨의 [[북주]](557~581)는 진나라를 치기 위해 [[무제(남진)|진패선]]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형왕 진창(陳昌)[* 진패선의 막내 아들이자 자는 경업(敬業)이다.]을 시켜 공격하게 했다. 진창은 왕림에게 막혀 안륙(安陸)까지만 쳐들어왔으나, 왕림이 사라지니 진창은 그대로 계속 진격할 수 있게 되었고, [[장강]]을 따라 동진하면서 진천에게 무례한 편지를 보내 제위를 요구했다. 진천은 후안도를 불러 진창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왕으로 내려갈까라고 물어보았다. 이에 후안도는 그러지 말라고 하며 일단 몸소 나가 진창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한달 후, 진창이 진나라 영토에 들어오자 후안도는 반갑게 맞이하며 둘은 장강을 따라 배를 탄채 오고 있었다. 갑자기 후안도가 진창을 죽여버리고 장강에 던졌으며, 건강에 도착해 진창이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고 보고했다. 진천은 후안도가 진창을 죽였다는 걸 알면서도 이를 기쁘게 여기고 후안도를 청원공에 봉했다. 대신 죽은 [[사촌]] 동생이 불쌍했는지 자신의 7남 형양왕 진백신(陳伯信)을 양자로 삼아줬다. 진천은 백성의 고통을 알았으며 즉위 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 또 사리분별에 능했고 신하들의 간악한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천강]] 원년([[566년]]) [[4월]], 재위 8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건강 유각전에서 사망했고, [[6월]]에 영녕릉에 안장되었다. 진천은 [[태자]] [[진백종]]이 개인적으로 너무 유약해서 황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염려되어 제위를 동생 [[선제(남진)|진욱]]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진욱은 거절했고 관료인 공환(孔奐)도 반대했다. 결국 진천은 진욱을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지만 진욱과 공환, 도중거(到仲舉), 원추(袁樞), 유사지(劉師知) 등에게 진백종을 보좌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