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제(수) (문단 편집) === 집권 전 === 양견은 홍농의 화음 출신으로 수국공 [[양충]](楊忠)[* 태조(太祖) 무원황제(武元皇帝)로 추존.]과 여씨(呂氏)[* 이름은 여고도(呂苦桃)로 원명황후(元明皇后)로 추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홍농 양씨'''는 [[주나라]] 대부터 이어진 한족의 명문가[* 《삼국지》의 [[양표]], [[양수]] 부자도 홍농 양씨였다.]로 후대의 기록에서 양견의 집안은 양진의 후손을 자칭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선비족]] 탁발씨가 건국한 [[북위]]의 황제인 [[효문제]]가 지배자인 선비족들의 성씨를 한족 성씨로 바꾸는 과정이 있었고, 이 영향으로 훗날 양견의 아버지인 양충이 한족 성씨인 양씨를 하사받았다. 즉 북위가 [[한족]] 땅을 정복하면서 나타난 8주국 '''선비족 가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하나의 성씨는 보륙여씨(普六茹氏)인데 양충이 [[서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서위)|공제]]로부터 하사받은 성이었다. 아버지 양충은 독고신의 부하로 독고신과 양충은 [[서위]]의 실권자였던 [[우문태]]에게 의지하던 상태였다. 양충은 우문태의 아들인 효민제 우문각이 원씨(탁발씨)의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를 세울 때 여러 차례 공훈을 쌓아서, 북주 정권에서 공훈을 쌓은 관리 가운데 가장 높은 칭호인 '주국대장군'의 직위에 있었으며 '수국공'에 봉해졌고 재상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의'를 맡아 제국의 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양견은 부친 양충을 이은 수국공으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아버지의 공훈 덕분에 다양한 관직에 앉을 수가 있었다. 한번은 서위의 권신인 우문태가 어린 양견을 보고 >"이 아이의 골격과 풍채는 세상 사람과 같지 않다." 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게 양견은 아버지 양충 덕분에 관직이 계속 높아졌고 그런 양견에게 위협을 느낀 북주의 명제 [[우문육]]은 관상가 조소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는데 그는 양견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일부러 명제 우문육에게 양견은 대장군 감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양견에게는 >'''"공은 천하의 황제가 될 사람이오, 하지만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안정될 것이니, 부디 내 말을 기억하시오."'''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제(전한)|한고제 유방]]처럼 소위 '융준용안'의 풍모였던 것 같다. 이후 양견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생각한 독고신은 양견의 나이 16세 때 자신의 딸 [[독고가라]]를 시집보냈다. 선비족의 대귀족인 독고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양견은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젊어서부터 양씨 가문과 독고씨 가문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573년 [[무제(북주)|무제]] 우문옹은 양견의 장녀 양여화를 자신의 아들이자 훗날 북주의 선제가 되는 태자 [[우문윤]]의 비로 삼았으므로 양견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표기대장군'과 '대흥군공' 등의 벼슬도 받아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은 다른 사람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기에 그를 시기하고 암살하려고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양견은 그 뒤에도 군대를 이끌며 [[북제]]의 군대를 격파하여 '주국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선제 우문윤이 제위에 오르자 두각을 드러내던 양견은 실권자로 부상하여, 사위인 선제가 순행을 나갈 때면 언제나 양견에게 도성을 지키도록 했다. 선제는 엄격하고 잔혹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양견은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기에 점차 장인인 양견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무능했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여 주변에 자신을 위하는 인재가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양견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선제 우문윤의 황후들이 서로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양견의 딸인 양황후의 질투에 분노한 선제가 화가 나서 >'''"[[끔살|내가 반드시 너의 가족들을 멸족시킬 것이다]]."''' 라며 격노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명령하여 궁궐에 살수들을 매복시킨 뒤, 살수들에게 >'''"만약 양견이 조금이라도 무례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그를 죽이라고 명령할 테니 그때 양견을 죽여라!"''' 라고 명령했다. 그후 장인인 양견을 궁궐로 불러서 정사를 논의했는데, 양견은 이미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기 때문에 사위인 황제의 뜻을 알아차리고,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황제가 아무리 자극을 하고 무례하게 굴어도 표정 변화조차 없어 죽일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북주에서 봉직하며 살던 중 선제가 579년에 붕어하고 양견의 외손자'''뻘인''' 어린 정제 [[정제(북주)|우문천]]이 즉위했다. 보통 우문천이 양견의 외손자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친 외손자가 아니다. 물론 양견이 선제 우문윤의 장인인 것은 사실이나 선제는 황후가 4명이었다. 정제는 선제의 황후 중 한 명이었던 천대황후 주씨의 아들로서 양견의 딸인 천원대황후 양씨의 소생이 아니었다. 훗날 황태후 양씨는 양견이 선양을 받고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뒤 졸지에 황태후에서 공주로 신분이 변하고 말았는데, 이러한 케이스의 또 다른 인물로 신나라의 가황제 [[왕망]]의 딸이자 [[전한]] [[평제]]의 황후였던 황황실주 왕씨가 있다. 어쨌거나 정제 우문천은 나이가 고작 8살 정도에 불과하여 제대로 국정을 이끌 수가 없었고, 결국 많은 신하들의 동의하에 외조부 '격'인 양견이 조정의 정치를 관장하고 어린 정제를 보좌하며 [[구석]](九錫)을 하사받은 후, 수왕(隨王)이자 승상, 섭정으로서 북주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는 선제의 동생인 우문찬이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양견은 그에게 >"당신이 앞으로 황제가 되실 분이시니 당분간 나랏일에 신경쓰실 것이 아니라 집에서 소식을 기다리면 된다." 고 안심시켰다. 그 다음으로 양견은 지방에 있는 우문씨의 다섯 왕들을 정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궁궐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즉시 그들의 병권과 인신을 빼앗았다. 이에 이들은 우문씨가 세운 나라의 어린 황제가 양견에게 조종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이들 중 한 명인 조왕 [[우문초]]는 양견을 자신의 왕부로 초대하여 술을 마실 때 죽일 계획을 세웠다. 조왕의 요청에 응한 양견은 양홍과 원주 등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그의 저택으로 갔다, 양견은 조왕이 혹시라도 술에 독을 탈까 봐 마실 술을 직접 들고 갔다. 양견이 저택에 도착하자 조왕은 아들에게 >"네가 술안주로 [[오이]]를 가지고 들어와라, 내가 칼로 오이를 깎는 척 하면서 양견을 찔러 죽이겠다." 라고 은밀히 말했다. 조왕은 양견을 내실로 안내할 때 두 사람만이 허심탄회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명분으로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만 양견은 양홍과 원주와 같은 최측근만 내실 문 밖에서 대기하게 했다. 양견과 조왕 우문초가 술을 마시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할 때, 조왕은 계속 칼로 오이를 깎아서 양견에게 계속 먹였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조왕은 오이를 먹이는 틈을 타서 양견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원주가 문을 열고 내실로 뛰어들어와서 >"승상부에 급히 처리해야 할 공무가 많아서 지금 빨리 승상부로 가야 합니다." 라며 양견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에게 화를 내면서 >"나와 승상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놈이 감히 나서느냐? 당장 물러가라!" 라며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원주는 칼을 쥔 채 조왕을 노려보며 양견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조왕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원주에게 술을 조금 나눠주고는 거짓으로 구토하는 척을 하면서 후원의 누각으로 갔으나 조왕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한 원주는 조왕을 따라갔고, 그를 부축하여 내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를 내쫓기 위해 물을 가져오라 했지만 원주는 듣지 않았다. 때마침 등왕 우문유가 조왕의 왕부에 도착했고, 양견이 그를 맞이하러 내실에서 나왔을 때 원주가 양견에게 귀엣말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선수를 친다면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괜찮으니 어서 떠나시지요." 라며 재촉하여, 양견은 내실에 돌아온 후에 바쁜 일이 있다며 측근 양홍과 함께 떠났다. 그러자 조왕이 양견을 막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원주가 몸으로 문을 가로막아서 그를 나오지 못하게 했고, 그렇게 [[암살]] 시도는 끝이 났다. 마치 옛날 《[[초한지]]》의 [[홍문연]]처럼 원주는 기지를 발휘하여 적진 한가운데에서 목숨이 위험했던 주군 양견을 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양견은 조왕 우문초와 등왕 우문유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고, 나머지 우문씨의 세 왕도 차례로 제거해 북주의 우문씨 황족과 지방의 세력[* 울지형, 사마소난, 왕겸 등]을 완전히 제압했다. 사실 양견은 자신의 손자뻘이었던 정제를 폐위시키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 독고가라가 양견에게 >'''"[[기호지세|당신은 이미 하루에 1,000리를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처지이니 이제는 내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라는 밀서를 보내서 황제가 되는 것을 결심하게 했고, 이에 양견은 마음을 정하여 어린 정제를 압박했다. 결국 이듬해 옥좌를 지킬 힘이 없었던 정제는 제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 '''"옛날에 [[요(삼황오제)|요]] 임금이 [[순(삼황오제)|순]] 임금에게, [[헌제|한나라 헌제]]와 [[조환|위나라 원제]]가 황위를 [[선양]]했듯이, 짐도 천하의 안정을 위해 선양하노라."''' 양견은 많은 [[찬탈]]자들이 그랬듯이 정제의 선양을 예의상 세 번 정도 거절하고 난 후 황제의 옥좌에 올랐다. 양견은 수왕(隨王)이었지만 '[[隨|수(隨)]]'의 '[[辵|책받침변(辶)]]'이 갑자기 가다가 멈춘다는 불길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책받침변(辶)'을 빼고 '[[隋|수(隋)]]' 자를 [[수나라|새로 만들어 국호로 정했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제 양견이 붕어한 후에 제위를 물려받은 [[양제(수)|양제]]의 폭주 때문에 수나라는 건국한 지 38년 만에 몰락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황제가 된 양견은 앞서 관상가 조소가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안정될 것"이라 말했듯, 자기에게 양위한 정제는 물론이고 그의 일족인 우문씨를 다 죽여버리며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