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제(수) (문단 편집) === 후대 왕조들에게 길이 영향을 미친 정치 능력 === 수문제가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억누르고 저마다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며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한 것은 지대한 업적으로,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 왕조들이 토지 정책의 기본적인 틀로 삼았다. 또한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걷지도 않는 행보도 보였다. 현실 국가에서 이렇게 하려면 석유나 천연 가스 같은 자원들이 왕창 나와야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수나라의 재정이 좋았고 경기도 활성화됐다는 뜻이다. 지방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한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현대에도 [[중화민국]]([[대만]])의 행정구역에 향진시구, 리통반으로 남아 있다.],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했다. 게다가 관료들의 부패를 끔찍이 싫어했던 탓에 뇌물수수를 엄격히 밝히는 한편 뇌물과 관련된 관료는 모두 처형했다. 심지어 자기가 뇌물을 보내놓고 받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을 정도니 다른 것은 몰라도 뇌물과 사치에 한정하여 굉장히 엄격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당시 관리들의 일상복은 귀한 비단으로는 만들 수가 없었고, 허리띠의 장식도 금옥이 아닌 쇠붙이나 뿔로 만들어야 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 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관롱집단]]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마디로 수문제가 선거제를 병행하면서 황제는 귀족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선거제를 통해 등용된 관료들은 착실한 친황제파가 되었다. 이는 [[당나라]] 중기부터 귀족을 견제할 [[사대부]] 계층의 형성을 이루어냈고, [[송나라]] 시기까지 가면 귀족 대신 사대부가 국정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구당서]]》와《[[정관정요]]》에서 [[태종(당)|당태종]]이 신하들과 회의하다가 수문제의 정치는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신하들은 >'''위사전찬'''(衛士傳餐) 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혼자 모든 일을 밤늦도록 처결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어서 시위하는 군사들을 시켜 회의하는 곳으로 식사를 날라오게 했다는 뜻이다.[* [[시황제|진시황]]이 하루에 150근의 서류를 저울에 재어놓고 모두 처리하기 전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형석정서'''(衡石程書)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군주가 모든 국정을 자신이 나서서 도맡아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렇게 문제는 '''정치와 국가 운영을 신하의 도움을 받기보다 자기 혼자서 다 해먹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선 《[[정관정요]]》에서 [[태종(당)|당태종]]이 신하들에게 수문제에 대해 물으니 신하는 '''혼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수문제를 뛰어나고 근면하다고 평가'''했는데 당태종은 그 말을 부정하고 그건 그가 '''근면하다기보다는 의심이 많아서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다 맡은 것일 뿐'''이며 그래서 국가 운영이 늦어진다고 깠다. 다만 여기서 알 것은 '''수문제가 중요한 국정 운영과 일은 혼자서 다 맡아서 처리했다는 것'''을 신하들과 당태종 모두 동의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근면성실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전술한 수문제의 '''위사전찬'''(衛士傳餐)이라는 고사를 똑같이 실행한 이가 후대의 [[문종(당)|당문종]]이었다. 수문제 시절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다. 제주 참군 왕가라는 사람이 70여 명의 죄수를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죄수들이 너무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죄수들의 몸에 걸친 칼과 쇠사슬을 풀도록 명령하고, 아울러 압송을 담당한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언제까지 장안에 도착하라고 이야기했다. 만약 죄수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형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죄수들은 모두 약속한 날짜에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고 전부 장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자 수문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죄수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 그들에게 주안상을 하사하고 죄를 사면했다. 그리고 왕가의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렸다. 한 번은 [[관중]] 지방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수문제는 측근을 보내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을 수문제에게 진상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수라의 반찬을 줄이고 오랫동안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수문제가 [[이질]]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어의가 궁궐에서 이질약을 조제하는데 필요한 호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황제에게 처방할 약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궁궐에서 근검절약했던 것이다. 그는 태자 양용에게 >'''"자고로 사치한 제왕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태자는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라는 훈계도 했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히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 수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00만 호를 채우지 못했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현종(당)|당현종]] 시절의 전성기에 가야 겨우 복구가 된다.[* 수문제가 재위 중이던 606년 수나라 인구가 890만 7,000여 호(약 4,600만 명으로 추정), 당현종 재위 당시인 754년경의 당나라 인구가 906만 9,000여 호(약 5,288만 명으로 추정). 즉, 이 말은 수문제의 아들인 [[양제(수)|수양제]]가 이후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개막장짓을 했다는 것이다.] 인구 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당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았다.'''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 때문에 곧바로 건설을 중단했다. 이처럼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 드문 [[성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고제(전한)|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지치|문경치세]]를 거쳐 [[무제(전한)|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전한|한나라]]의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 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물론 이런 수문제도 결점은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고, 601년에는 군현의 모든 교육 기관들을 폐지한 후 중앙에 국자감만을 두어 귀족 자제들만 공부하게 했다. 나이가 들수록 관리들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법의 함정을 파놓고 관리들이 걸려들면 가차없이 처단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툭하면 매질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또한 말년에 감정 기복이 심해져 자신의 기분에 따라 신하들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점은 있었지만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는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국가들과 주변 [[동아시아]] 국가 정치 제도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