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제(수) (문단 편집) === [[관롱집단]] 문제 === 그러나 수문제의 이러한 정책으로 자신들이 무시당한다고 여긴 [[문벌귀족(중국)|권문세족]]들은 수많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게 소규모라고 보긴 절대 어려운 것이, 수문제와 인척 관계로 연결된 관롱집단의 집단적인 반발에 더해 반란, 특히 대규모 지주가 경제정책의 중심이었던 장강 이남의 옛 남조 지역에서의 반발이 극심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대규모 운집만 안 했지, 반란 세력이 들끓었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수 있다. 한 번의 정복 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지주들을 척결해버리기 위해 제2차 통일전쟁을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것도 대규모 지주 출신인 [[관롱집단]]의 [[고조(당)|이연]]이 건국한 [[당나라]]였다. 애초에 수나라의 황족인 홍농 양씨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농서 이씨 가문이 모조리 한 고을(무천진)에 모여 살던 세력이었다. 이는 양견이 관롱집단이라는 장안 주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왕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력에서의 역학 관계로, 그들 덕에 제왕이 될 수 있었던 탓에 그들의 세력과 의견을 무시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어서 발생한 문제였다. 따라서 문제는 말년에 점차 노골적으로 관롱집단과 대립하며 숙청과 비리 척결, 외정이라는 강경책을 단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수문제 양견이 계속해서 관롱 세력들에게 지속적인 강경책을 썼으면 결국에는 [[관롱집단]]의 소멸로 이어졌겠지만 양견이 [[양제(수)|아들]]과의 정쟁에 휘말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수양제가 [[사마소|탈법적인 수단으로]] [[사마염|제위에 오르면서]] 기존 귀족 세력에게 좋은 명분거리 하나를 던져주게 된 것이다. 결국 수양제는 최소 귀족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궁전을 증축하는 한편, [[대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정벌 사업을 벌이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애당초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제위에 오른지라 귀족 집단의 지지를 받거나 최소한의 반발을 막기 위해 귀족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결국에는 수양제의 [[자업자득]]이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골때리는 짓이지만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은 이러한 대운하 공사와 정복 사업에 대해 모두 환영하고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귀족 집단은 계속 존속했으며 관롱집단, 특히 6진 중에서도 무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무천진 군벌은 당나라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론 [[태종(당)|당태종]] 치세기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고종(당)|당고종]]대에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였다. 다만 측천무후가 날려버린 것은 아니고, 측천무후를 핑계로 [[고종(당)|당고종]]이 손을 봤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조선의 [[숙종(조선)|숙종]]이 [[희빈 장씨|장희빈]]을 핑계로 [[환국(조선)|환국]]정치를 해서 왕권을 강화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자세한 것은 [[측천무후]] 항목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