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제(수) (문단 편집) == 평가 == 무려 360여년이나 지속된 대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제위에 올라 현대 [[중국]]의 기틀까지 다진 [[중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일부 사람들은 통일 군주라는 점에서 [[시황제|진시황]], [[사마염|서진 무제]]와 함께 거론하지만, 수문제는 후대에 폭군 취급을 받는 두 사람과 달리 이들과 비교되는 것이 모욕이다.[* 다만 진시황은 초반에는 잘 나가다가 통일 이후 지나치게 가혹한 통치를 펼쳐 민심을 잃었다. 무제 사마염도 천하를 얻은 뒤 후계 문제 등을 개판쳐서 [[팔왕의 난]]이 일어나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 치세 후반부의 행보 때문에 평가를 깎아먹는 두 사람과 달리 수문제는 말년까지도 나라를 잘 다스렸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는 [[양제(수)|아들]]이 훗날 모든 것을 말아먹기 전까지 수나라는 문제의 치세하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국토를 넓히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 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수나라를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시켰다. 문제 때 연호가 개황(開皇)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태평성대]]를 '''개황성세'''(開皇盛世)[* 혹은 개황의 치(開皇之治).]라고 한다. 중국이나 동아시아권보다는 서구권에서 비교적 더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유럽]]은 [[로마 제국]]의 [[서로마 제국|분열]] [[동로마 제국|이후]] 통일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나뉜 반면[* 그나마 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유럽연합]]이라는 연합기구가 출범하기는 했다. 다만 유럽연합은 어디까지나 국가연합 수준이고, 결코 통일국가는 아니다. 또한 유럽연합도 내부 구성 국가들끼리의 내분과 의견 충돌이 심해서, 출범 당시 [[미국]]과 대등한 수준의 새로운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예측과는 정반대로 국제 무대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수문제가 재통합하여 오늘날의 거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에 서양에서는 [[세계사]]의 중요 인물을 뽑으면 100위 안, 그것도 제왕들 가운데서 10위 안에 꼽는다. 일명 위대한 중국 황제 '''성인가한(聖人可汗)'''이라 하여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수나라가 워낙 빠르고도 성대하게 멸망해서 수나라에 관련된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에 수문제 또한 오랫동안 폄하당하거나 무시당했지만, [[서양]] 학자들이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평가가 뒤바뀌었다. 특히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래 400여년이나 분열했던 중국을 재통일한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서양 학계에서 '''분열된 유럽'''에 대응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후한 말 분열된 중국을 280년부터 300년까지 20여 년 정도 [[서진]]이 통일하기도 했고,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진]]이 [[비수대전|중국 대륙을 통일하려는 움직임]]도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은 인정할지 몰라도 서양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비교 대상인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제국]]은 애당초 [[봉건제]]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나름대로 [[관료제]]가 정착해 [[중앙집권제|중앙집권]]적 통제가 용이했던 중국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도 무리이기는 하다. 다만 서구 사학계의 평가를 과대평가로 단정하는 것 역시 적절치 못한 면이 있는데,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것이 수문제가 아닌 [[고제(전한)|한고제]]와 [[한나라]]라고 한다면, 이런 식으로 따질 때 [[유럽사]]에서 한나라에 대응하는 것은 [[카롤루스 대제]]와 [[프랑크 왕국]]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와 [[로마 제국]]이다. 로마 제국이든 한나라든 고대사 말기에 나타나 하나의 세계를 통합했고 이 제국의 영역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럽 문명권과 중화 문명권의 정체성이 나타났다. 이 두 제국은 내부의 모순 축적과, 제국의 전성기 시절 비문명화된 [[야만족]]으로 여겼던 이민족의 위협으로 몰락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덤으로 몰락으로 인해 제국의 중심부를 상실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남은 제국]]의 [[남조#s-1.1|세력]]은 명맥을 이어가며 결과적으로 통일제국 시대의 문화유산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제국이 붕괴하고 그 고토는 통일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나 분열기를 겪으며 혼란의 [[도가니탕]]을 끓이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등장하여 분열된 영역의 재통합을 지향했다는 것이 카롤루스 대제와 수문제의 공통점이며, 결국 중국의 재통합으로 이어질 길을 여는데 성공한 수문제와 달리 카롤루스 대제의 시도는 서유럽의 재통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를 두고 수문제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까지는 아니라고 말한다면, 카롤루스 대제 역시 '''[[보편제국]] [[신성 로마 제국|로마]]'''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도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다. 카롤루스 대제를 '''Pater Europae{{{-2 ([[유럽]]의 아버지)}}}'''라고 보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수문제 역시 한나라 멸망 이후 360여년에 이르는 기나긴 분열과 혼란기 동안 기존 제국의 정치 구조가 완전히 해체된 상황에서 [[당나라]]와 이후의 통일 왕조들로 이어질 정치 구조를 구축한 인물이기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나라 통일 이전 [[위진남북조시대]]에도 [[부견]]의 [[비수대전]]과 같이 중국을 재통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로마도 마찬가지였으며]], 하다 못해 [[신성 로마 제국]]도 통합된 국가로 발전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은 처음부터 [[봉건제]]라는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나 수나라 역시 처음부터 [[관롱집단]]의 군벌들과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의 폐쇄적인 귀족 세력을 끌어안고 있었다. 물론 중국이 이른 시기부터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전통을 형성해 왔고, 재통합에 유리한 영향력을 끼쳤음은 분명하지만 중국의 관료제라 한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으며, 중국이든 유럽이든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군주들은 휘하 군벌들이나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흡수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서구 학계의 고평가를 '''분열된 유럽'''에 대응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만 평가한 결과물이라는 의견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총평하자면 수문제가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