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종(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비서성교감(秘書省校勘) 경정상(慶鼎相)을 권지직한림원(權知直翰林院)으로 삼았다. 중서성에서 아뢰기를, “경정상은 철장(鐵匠)[* 철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기술자.]의 후예로 청요직을 제수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청컨대 삭제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순무를 캐면서 뿌리로써 판단하지 말라[* 采篈采菲無以下體.[br]사람의 뿌리를 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 쓸만한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경정상의 재주와 식견이 쓸만한데, 어찌 세계(世系)[* 족보 혹은 혈통.]만을 문제 삼겠는가?'''” 하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 >문종 11년(1057) 정유년(正酉年) 7월. ㅡ '출신이 천한 경정상의 중용을 반대하는 [[중서문하성]]의 간언을 뿌리치며'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동북 변방(東北邊) 15주(十五州) 밖(外)의 '''번인(蕃人: 번국의 백성)들이 잇달아 귀부(歸附: 토지를 바치며 복종)해 오면서 우리 군현(郡縣)에 편입시켜 달라는 간청이 지금에도 끊이지 않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 덕분이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먼저 종묘와 사직에 사유를 고하게 하고, 멀고 가까운 번인들이 모두 귀순하기(畢納)를 기다려서 주현(州縣)을 넓혀 정한 뒤에 몸소 종묘와 사직에 감사를 행하려고 한다. 그 행례(行禮)와 태자가 대행하는 의식 절차를 유사(有司)는 자세히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 >---- >문종 27년 4월 3일 中. 《고려사》 [[고려]]의 제11대 [[대왕]]이자 [[천자|해동천자]].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인효대왕(仁孝大王). [[휘]]는 휘(徽), [[자(이름)|자]]는 촉유(燭幽). [[여요전쟁|거란을 격퇴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인종(고려)|인종]] 대까지 지속될 황금기의 발판을 마련한 아버지 [[현종(고려)|현종]] 시절부터 형들인 [[덕종(고려)|덕종]]과 [[정종(고려 10대)|정종]]이 잘 이끌어온 고려의 전성기를 이어받아 '''고려사를 넘어 한국사의 몇 안되는 최전성기를 열어젖힌 [[성군]]이자 [[명군]]'''이었다. 문종 치세 37년 동안 고려는 [[사회]],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여진족|여진]], [[탐라]], [[일본]]계 [[호족(한국사)|호족]]들을 아우르던 '''해동천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대다수의 여진 [[번국|제번(諸藩)]]을 복속시켜 그곳에 고려의 행정구역인 11개의 [[군현제|주(州)]] 등을 설치하였으며 동여진이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마저 평정함으로써 고려의 기미주 지배 영역을 포함한 [[세력권|간접 영토·영향권]] 범위를 최대로 확장시켰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3&totalCount=3&itemId=n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1&levelId=nh_015_0030_0030_0010_0020_001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AC%B8%EC%A2%85+%EA%B8%B0%EB%AF%B8%EC%A3%BC&searchKeywordConjunction=AND (고려의 대여진 기미정책의 성공),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1&prevPage=0&prevLimit=&itemId=hn&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hn_034_0040_0020&position=-1# (公嶮鎭과 先春嶺의 위치 비정)] 즉 문종 시대는 그야말로 주변 사방의 모든 세력들이 끊임없이 안으로 귀부해 오던 고려 황금기의 절정이었다. 물론 문종도 재위 기간에 [[문벌귀족]]들의 힘이 막강해져서 문벌귀족 사회의 폐해를 초래했다는 실책 또한 제기되지만, 문종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건 결과론적인 단편적 해석이고, 보다 장기적인 고려사 전체의 역사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