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설명 == >"마오쩌둥은 1966년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마오쩌둥은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고, 학생들로 하여금 홍위병이 되어 ‘부르주아 전문가’로 일컬어졌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이 혁명운동은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았다. 홍위병들은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면서 정부와 당의 간부들을 공격하고 군부대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1969년에 인민해방군이 질서를 회복하기 전까지 온 나라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 ---- >판도라의 상자 : 중국 - 수잔 셔크(p.19~20) >"의심할 여지 없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중에 무산계급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반드시 지주들과 기타 착취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이런 부패한 것들을 대체할 것이다.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여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을 쓸어버릴 것이다." >----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문화 혁명(文化革命)" 또는 더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破四舊)'''라 하여,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이타주의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역사적인 문화 검열 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실행된 대규모 [[반달리즘]]이 됐을 뿐이다.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자.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중국이란 넓고 오래된 나라에서 전국 규모로 일어난 이 사건의 이름은 문화'대혁명'이지만 그 실상은 문화'[[대숙청]]', 문화'[[반달리즘|대파괴]]'였다. 이때 일어난 파괴의 수준은 [[분서갱유]] 같은 전승국에 의한 패전국 "문명 파괴"였다고 보면 된다. 단 외국의 문명이 아니라 자국의 문명을 파괴한 게 코미디.[* 중화인민공화국은 스스로를 '[[신중국]]'으로 칭했으며, 그 이전의 중국은 '구중국'으로 보았다. 어떻게 보면 반쯤은 다른 나라로 취급했던 셈.] 앞서 언급했듯 모든 성공한 정치적 행위가 그러한 것처럼 문화대혁명의 명분 또한 "이제 경제, 정치 분야의 혁명이 완수되었으니, 그보다 상부 구조인 문화를 개혁할 단계다"라는 듣기 좋은 것이었으나, 문제는 이에 따라 구체제의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관료제, 위계 질서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분서갱유]], [[문자의 옥]] 등의 반달리즘이 여러 번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 전체에 끼친 피해는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을 훨씬 능가한다.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은 적어도 자국의 문화산업까지 파탄 내진 않았다. 중국이 고전 문화 산업에선 아직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문화대혁명 때문에 이마저도 유교 관련 기록물들을 유교문화가 꽤 남아있는 한국이나 역사적으로 중국과 앙숙인 베트남에서 역수입하고 있는 실정이고 당연히 현대 대중 문화 면에서는 엄청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사실 이 문화대혁명식 반달리즘의 진수는 문화재 파괴보다도 문화 예술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린치에 있다. 주변에 문화 예술 쪽으로 종사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집에 쳐들어가서 "게으름뱅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두들겨 팬 뒤, "현실 체험"이라면서 집단 농장에 감금하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이러니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제각기 대중 문화를 발달시켜가던 20세기 후반에, 중국의 대중 문화는 그런 단계를 전혀 밟을 수가 없었다.[* 개혁개방이 실시되는 1980년대 이후로는 인적 자원 문제는 거의 해소되었다. 일단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시장 규모도 성장하면서, 대중 문화도 성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도''' [[중국 공산당]]에 의한 문화 검열이 상당 부분 남아있다는 것과, 그동안의 발달이 미약하다보니 미국이나 일본, 홍콩, 한국, 유럽 등지의 대중 문화에게 상당량 먹혀버렸다.] 이 사건이 이런 식으로 "혁명"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실상은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식 대폭동 비슷하게 흘러간 이유는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된 뒷배경 자체가 처음부터 극히 불순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을 마치 [[프랑스 혁명]]의 동양판쯤으로 선전했다.[* 사실 프랑스 혁명 와중에도 문혁마냥 (특히 왕권과 관련된)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이 파괴됐다.] 서구 지식인들도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진짜로 이렇게 믿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을 뒤덮었던 시기에는 [[중국공산당]]의 [[높으신 분]]들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들 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당]]의 고위 간부였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순식간에 몰락했고 시진핑 자신도 량자허촌으로 [[상산하향 운동|하방]]되어 토굴집에서 살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힘든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고 한다.[* 물론 현재 시진핑의 행보를 보면 이러한 일기가 어느 정도 과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못해도 7년 이상 시진핑이 깡촌 토굴집에서 고된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보고있다. 누나인 시허핑이 홍위병에게 폭행당한 후에 수치심에 자살하는 비극을 겪은 데다가 바둑기사인 [[녜웨이핑]]과 친해진 계기가 반동의 아들로 손가락질 당하는 처지라는 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속 편한 것은 아니라는 것.] 마오쩌둥이 이렇게 노욕의 끝판왕으로 사는 동안의 중국의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다. 우선 1967년과 1968년도에 마이너스 5.7%, 4.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류사오치 시절의 경제회복의 성과를 까먹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홍위병이 하방되어 사회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농어촌 개발이 진행되어 16%, 1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중반에 경제성장이 2.3%까지 내려앉는 등 냉온탕을 오갔다. 결국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유지하면서[* 물론 그 기간에 굴곡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국에 비하면 그 정도가 훨씬 덜했다.] 중국의 경제력을 급속히 따라잡았고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후진 개도국으로 남게 되었다. 1960년 세계경제력 순위에서 중국은 세계 5위를 차지했고 1965년에는 6위를 기록했는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이후로는 서독과 이탈리아, 브라질 등에게 따라잡혀서 1976년에는 10위로 떨어지게 되었고, 1981년에 13위를 기록함으로써 정점에 달했다.[* 참고로 1981년 당시의 중국의 경제규모는 호주보다도 작았다! 인구 수를 감안하면(호주의 인구는 대한민국의 절반도 안된다. 중국의 거의 1/50정도였다.) 국제망신이 될 굴욕인 셈이다.] 그것도 그나마 인구증가율이 높아서 유지했지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문혁의 후유증이 수습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에 힘을 쓰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직후의 풍경은 요즘 코드로 비유하면 거의 [[매드 맥스]]급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조선족]] 중장년층 사이에서도 당시 중국의 상태와 달리 [[북한]]은 적어도 국가로서의 형태는 갖추고 있어서 질 좋은 물건 좀 얻어올려고 북한으로 갔다는 증언을 할 정도로 막장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