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건국 초기 사회 불안과 대약진 운동의 실패 === 1949년 국공내전 승리 이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었다.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농촌 민주주의자 소리를 들으며 부패한 [[장제스]] 독재 정권의 완벽한 대체제로 인식되던 공산당은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오히려 장제스 정권보다도 더한 독재와 부패를 보여주었다. 흔히 공산화 이후 1949년~1957년까지는 대약진 이전의 평화기로 인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시기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상층 구조의 창출, 토지 개혁, 집산화, 전매제 실행 등의 무리한 정책의 시행으로 인하여 인민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으며 이전에 없던 종교와 외국인, 자본가들에 대한 난폭한 공격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토지 개혁 과정에서 70~200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집산화, 전매제에 저항하는 여러 봉기 진압과 종교에 대한 탄압 등을 계산해보면 공산화 초기에만 최대 400만 이상이 정권에 희생되었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나타난 통계 조작, 장부 조작 등에 대해서 관료들이 국민당 시절의 개버릇 못 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국민당 시절 공무원들의 경우, 50년대 초반부터 대대적으로 숙청당해 공산당 출신 하부조직들로 대체된 상황이었고 지도자 비위 맞추기 위한 통계조작 같은 것은 모든 독재국가에서 관리가 없으면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며 공산당이라고 부패가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더욱이 아직까지 구시대의 관습에 젖어있던 공산당 간부들이 지역의 집단농장에서 마치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 사례들도 보고되어 마오쩌둥이 이들에 대한 숙청을 지시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공산정권의 모습에 실망하여 전국 각지에 반발이 빗발쳤고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의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비판에 자극받은 마오쩌둥이 실시한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운동에서는 전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에 국영언론들까지 거의 비난에 가까운 어조를 쏟아내며 '장제스가 나았다!'고 외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이 시기의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이나 노동쟁의는 국민당 시절의 가장 거센 반정부 시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경악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즉각 반우운동을 진행하여 대숙청을 감행해 당과 국가 내 반대파들을 완전히 숙청하면서 싹쓸이를 해버렸다. 여기서 마오가 모든 직장과 기관에 10~20%의 우파가 숨어있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는 통에, 의무적으로 모든 기관이 직원의 10%가량을 해고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대약진 운동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결과 수천만 명의 사람이 굶어죽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며 중국 내부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현실을 경시한 공산주의의 이론적 문제도 있었지만 오랜 내전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이 지나치게 조직화가 되었고, [[민주집중제]]보다 한술 더 뜬 [[주석(직위)|주석]]제의 공산당으로 초권력적(超權力的)인 집단이 되어 주석의 주장에 아무도 감히 반발할 수 없는 초권위주의적 정당으로 변한 것이 가장 컸다.[* 마오는 적어도 1943년 쯤에는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상명하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민중이 주인이라던 공산당의 이상은 점점 훼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워낙에 낙후된 농업국가[* 당시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는 일제가 만주에 건설한 공업지대뿐이었다. 이곳은 1980년대 개혁개방으로 상하이/선전을 개발하기 전까지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곳이었으며, 중국의 공업생산을 책임졌다.]이고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감시시스템이 없던 만큼 광적인 혁명열기 + 사적인 이익을 탐하는 공산당원들의 부정축재 행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이후에 나타난 모습을 '다섯 가지 풍조의 만연'이라 하는데 공산주의 풍조, 허위과장 풍조, 강제 명령 풍조, 생산의 눈먼 지휘 풍조, 간부 생활의 특수화 풍조가 그것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마오주의]]의 이상을 믿고 있던 공산당 내부 급진파와 혁명적 청년 공산주의자들,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을 다시 복원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류사오치는 안정화 대신에 대약진 운동의 결정적 책임을 '계급의 적'들에게 몰아서 수백만 명의 당원을 숙청하고 수만 명의 당원을 처형하고 현 사태에 반발하는 젊은 학생들을 마오쩌둥의 반우운동을 롤모델삼아 우파 기회주의자로 몰아서 마구 탄압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첫 번째 홍위병이 되어 마오쩌둥의 지원 사격하에 죽창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돌리게 된다. 여기까지가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이미 중국은 내부에서 기아와 숙청, 내부정화 활동, 보수파의 약진, 노선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누군가가 불을 당기면 걷잡을 수 없이 펑하고 터질 상황이었다. 한편 1960년대 초중반에 걸쳐 경제가 점차적으로 정상화되던 시기에 라디오 생산단가가 급속히 하락하여 라디오의 생산량이 급속히 올라가게 되었고, 중국에서도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 남한이나 북한이나 라디오가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농어촌 지역에 라디오를 값싸게 대대적으로 보급했고, 북한에서는 제3방송이라고 하여 1955년부터 1975년까지 30년에 걸쳐서 유선라디오 방송망을 전국단위로 곳곳에 깔아댔다. 다만 선전목적이 작용했기도 한 데다가 전기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다는 점이나 라디오가 상당히 비싼 물품이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KBS 1라디오]]만 들을 수 있게끔 다이얼을 고정시켜놓는 경우가 많았고, 북한에서는 유선라디오는 채널 하나만 들을 수 있게끔 했다. ]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결합하여 라디오가 문화대혁명을 위한 선전도구로 널리 활용되었고, 중국사회와 문화에 그야말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