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전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chi_munhwa.jpg|width=100%]]}}} || || 홍위병의 '''제트기 형벌'''.[* 비판 대상자의 상반신을 구부리게 하고 두 사람이 옆에서 목덜미를 누르며 팔을 뒤로 꺾어 올린다.] || 1966년 8월 8일, 마오의 논평에 맞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关于无产阶级文化大革命的决定[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소위 말하는 '''16개항'''을 발표한다. 16개조의 내용은 쉽게 말해서 '''마오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진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지만, 그 표현의 자유는 '''[[홍위병]]이 자유롭게 기존의 낡은 것들을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목줄까지 풀린 홍위병들은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을 일으켜 대학살의 서막을 알렸다. [[홍위병]]들의 활동에 사실상 한없는 자유를 부여하자, 홍위병들은 날개 달린 듯이 다니고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면서 각지에서 소위 낡은 것들을 마구 파괴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절(불교)|절]], [[사당]], [[성당]]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으며, [[베이징]]과 [[상하이]]에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면서 사람들이 무차별로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안]]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 [[공안]] 수장 [[http://chinahumanitas.net/?bwl_kb=셰푸즈谢富治|셰푸즈]]는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공안]]이 막으려고 해도 홍위병들이 워낙 살기등등해서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었다는 말도 있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당시 공안은 현재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권위가 넘쳐나고 의심가는 사람을 체포영장없이 바로 잡아가는 수준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아니었던 것도 컸다. 공안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덩샤오핑 시기에 경제 성장으로 인한 범죄 증가를 막기 위해 지원과 권한을 대폭 강화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마오쩌둥은 이런 사태를 보고 받고도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라는 망언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오가 집권 후에 왜 이리 변했냐고 당황할 수도 있는데 마오는 원래 이랬다. 당장 1949년~1950년대 초반, 건국직후 대대적인 토지개혁 - 숙청을 단행했을 때 마오쩌둥은 전국의 숙청 과정을 감독하면서 직접 어느 지역에서 얼마만큼 죽이라고 할당치까지 제시하며 독촉하던 양반이었다. 그 예시로 토지개혁 단행 1년 만에 중국 전역에서 80~260만 명이 살해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부터가 대단히 잔인한 인간인 것.] 16개조에선 "'''무력 쓰지 말고 좋게 말로 하자'''", 정확하게 말하면, "'''투쟁수단은 무투(武鬪)보다는 문투(文鬪)가 좋다'''"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 말을 지키는 홍위병 따위 없었다. 뭐 '''언어폭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봐선 말로 하기도 한 모양이다.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당직에서 쫓겨나고, 이른바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난 뒤, 지방의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손에는 줄칼에 베인 흔적이 있는데, 이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얻은 상처다. 이후 그는 [[1973년]], [[저우언라이]]가 복귀시켜 줄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8월 22일, 마오는 아예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했다. 이제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9월 5일에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베이징을 방문한 홍위병들이 무려 '''1,100만여 명'''에 달했다. 이때 마오는 "'''숙식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다 대준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국가재정으로 자기 [[사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셈이었다. 10월 10일에는 린뱌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즉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펑더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서 [[조리돌림|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 다니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즈음 [[홍위병]]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세대교체도 이루어진다. 초기의 시설 파괴, 유적 파괴를 주도했던 홍위병들은 '''보수파'''라고 불리며, 이들은 홍오류라 하여 대부분 고위 간부나 당 관료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홍위병 사이에 만연하던 혈통주의에 대해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이라는 연설을 발표하면서 핍박받던 흑오류, 회오류 출신 홍위병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들은 "'''무투(武鬪)보다 문투(文鬪)를 하라!'''"라는 모토 하에 [[상산하향 운동|하방]](下放)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조반파(造反派)'''라고 한다. 조반파들과 보수파들은 문화대혁명 당시의 이런저런 책임을 서로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데 출신 배경의 차이라던가 여러 복잡한 사회, 정치적 문제가 얽히긴 했지만 악행으로는 결국 그놈이 그놈이다. [[홍위병]] 항목으로.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린뱌오와 장칭은 [[상하이]]를 장악하기 위해, [[홍위병]]과 [[언론]] 등을 통해 상하이 지방정부의 고위직들을 맹비난한 뒤 [[숙청]]했다. 사실상 상하이 지방정부의 [[행정]]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를 '''[[상하이 1월 폭풍 사건|1월의 폭풍]]'''이라고 한다. [[베이징]]에선 [[4인방]]과 박자가 잘 맞은 캉성이[* 참고로 캉성은 [[독립운동가]]였던 [[김산]]을 [[일본군]] [[스파이]]로 모함하여 처형시킨 장본인이다. 물론, 공산당 내에서는 정적을 일본군 스파이 등 갖가지 누명을 씌워 제거하는 것이 드물지는 않았기에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모두가 굶을 바에야 자본주의를 하자고 주장한 부총리 [[https://ko.wikipedia.org/wiki/타오주|타오주]]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시켜 버렸다. 이제 공산당 내에서는,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해 상대방을 반혁명분자로 모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마오는 인민일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크게 칭찬했다. 이 시기 노동부 부장이었던 [[리리싼]] 역시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장칭]]은 문혁(文革)의 기운을 [[인민해방군]]에까지 퍼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중국 건국에 기여한 [[인민해방군]]의 여러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우려를 표하자, 4인방은 언론을 동원해 문혁을 비판한 장성들을 맹비난했고, 그들은 결국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한 뒤 실각하고 만다. 이를 '''[[2월 역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대숙청]]과 마찬가지로, 개국 [[원수(계급)|원수]]로 추대된 최고위 장성들도 여럿 숙청되었다. 문혁 주도파였던 린뱌오는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지만 펑더화이와 허룽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뒤, 펑더화이는 비투회에 불려다니는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암으로 사망했고 허룽은 1966년 12월 30일 장칭이 칭화대학에서 허룽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것을 요청하자 겁에 질려 저우언라이에게 중난하이에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사정했으나 저우언라이는 거절했다. 결국 허룽은 홍위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했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단식하다가 1969년 6월 9일 사망했다. 그는 "나는 단지 마오쩌둥 주석이 한마디 말만 해주기를 바라오. '허룽은 나의 동지였다.'"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주더]]의 경우, 그나마 피해를 덜 봤지만 홍위병들로부터 군부 내에서 기어다니는 군벌 찌끄러기라는 욕을 듣고 있었으며 [[https://ko.wikipedia.org/wiki/녜룽전|녜룽전]], [[쉬샹첸]], [[예젠잉]], 천이는 [[2월 역류]]에서 문혁파에게 저항했다가 마오쩌둥이 장칭, 캉성, 천보다를 지지하는 통에 박살이 나서 쉬샹첸과 천이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천이]]는 공장 노동자로 [[상산하향 운동|하방]]조치당했다. 마오쩌둥은 3월 흑풍을 허용하면서 군부대가 홍위병을 진압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2월 역류로 인민해방군 지도부 자체가 무력화되었으며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으로 불어닥친 탈권 현상으로 인해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고 홍위병들이 군구 지도부 전체를 조리돌리며 군구 부사령관 급의 고급 장교들을 끌어내서 중태에 빠질 정도로 구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난징군구 총사령관 [[쉬스유]]는 백주대낮에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해군총사령관 [[샤오징광]]도 납치당해 톈진으로 압송되어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으니 이때의 혼란상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각 지방의 군구들이 홍위병의 공격으로 박살이 나서 군구 사령관도, 총정치위원도 없는 곳이 많았다. 중국의 안보와 전시상황에 존립을 책임지는 인민해방군이 겨우 동네 학생 꼬맹이들 모아서 조직한 홍위병에게 털렸다는 건 이때 얼마나 나라의 기본틀이 무시당했는지 보여준다. 한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홍위병들은 애초에 출신에 따라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어 있었고 원래부터 통일된 조직의 지휘를 받는 게 아니라 각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조직인지라 한 지방이나 학교에도 여러 홍위병 분파가 존재했고 홍위병의 각 병단들은 자신들이 더 혁명적으로 옳다면서 [[키배]]라고 쓰고 온갖 [[병림픽]]을 벌였으며 급기야 중화기로 무장하고 서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참다 못한 인민해방군이 출동해서 홍위병을 가리지 않고 때려잡기도 했다. 결국 [[1968년]]이 되자, 이제 더 이상 마오를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마오는 결국 [[신격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한 [[류사오치]]는 시골에 내려가 일개 농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씹었다. 결국 그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방치되다가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 입장에서도 다시금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다. 이 이상 홍위병이 날뛰는 것을 내버려두면, 마오의 권력까지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이 [[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을 하고, [[토사구팽|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위병을 하던 젊은이들은 소위 [[상산하향 운동|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 보내서 홍위병들을 사실상 해체했다. 모토는 [[마오이즘]]의 핵심인 [[상산하향 운동|하방]](下放) 활동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마오이즘]]은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역량으로 파악했고, 이들 사이에서 전위대를 조직해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래서 마오가 "'''니들 [[도시]]에선 혁명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노동하면서 거기서도 혁명을 완성해야지?'''"라고 하니까, 순진한 홍위병들은 우루루 낚였다. 마오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좋다고 농촌으로 추방당한 이들은 70년대 후반이 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다시 도시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쨌든 이들이 도시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면서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로 만들며 대만이 중국의 경제력을 따라잡게 공헌(?)한 것과는 다르게[* 중국 경제성장률 통계를 보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류사오치의 지도하에서 중국의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었는데 이를 순식간에 1967년 -5.7%, 1968년 -4.1%로 만들었다. 그나마 홍위병이 하방되어 사회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기저효과로 1969년과 197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플러스 16.9%, 19.4%로 회복되기는 한다.] 농촌에서 일하면서 문맹퇴치나 농업생산 증대에는 큰 역할을 담당했기에 [[농촌]]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긍정적 효과가 있기는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