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악영향 (문단 편집) === 음악 === 그나마 경극이나 무용극은 상대적으로 공연할 레퍼토리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나 관현악단의 경우, 이 1~2차 양판희나 대중 집회 때의 혁명가요 반주를 빼면 연주할 곡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인터내셔널가]]를 제외한 모든 국외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고, 피아니스트는 오로지 《홍등기》 피아노 반주곡판과 《황하 협주곡》만을 연주해야 했다. 관현악단도 《사가빈》과 《지취위호산》의 교향곡판과 《황하 협주곡》, 그리고 혁명 경극과 무용극 반주만 하면서 이 시기를 버텨내야 했다. 당연히 이 시기에 활동했던 지휘자와 관현악단 단원들, [[피아니스트]]들은 문화대혁명 후, 전부 당시 상황에 학을 떼며 부정적인 증언을 남기고 있다. 중국중앙교향악단(현 중국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였던 리더룬(李德倫)은 "하도 같은 곡을 수백 번 반복해 공연하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악단원들이 악보 없이, 심지어 눈 감고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상하이가무단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천셰양(陈燮阳)도 "우리는 문혁 시기 《백모녀》만, 그것도 수백 번을 공연했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이 일을 지겨워했지만 그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물론 시기와 장소에 따라 이 양판희 외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것도 양판희 작품을 편곡해 정부의 검열을 거쳐 허가받은 것만 가능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중국]]의 양악 분야는 나락으로 추락했고, 1977년에 가서야 수많은 금지곡 조치들이 해제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연주자뿐만 아니라 작곡가, 대본 작가, 연출가, 안무가들도 심한 탄압을 받았고, 양판희의 공동 창작 때를 빼면 개인 이름을 붙여 작품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예 거기서 배제된 인물들은 [[홍위병]]들에 의해 반혁명적이라며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투옥 혹은 하방(下放)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여자는 아예 홍위병들의 성노리개가 되고, 남자는 숙청을 당하거나 실종되어버리기도 했다. 몇 가지 예로 조선 출신 작곡가 [[정율성]]도 이 시기에 마찬가지로 고문과 투옥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문화대혁명 말기에 세상을 떠났고, 비슷하게 고문과 하방(下放) 노동을 당해야 했던 작곡가 왕시린(王西麟)도 홍위병들로부터 치아를 몇 개 잃고 얼굴 모양이 변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다가 살아남았다. 중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한 사람이자 촉망받는 작곡가였고 [[베이징]] 중앙음악원장과 중국 정치국원이라는 요직까지 올라갔던 마시총(馬思聰)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졸지에 사대주의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위협받기 시작했고, 결국 1967년에 가족들과 [[홍콩]]으로 밀항한 뒤 [[미국]]으로 망명해 그 곳에서 활동했다. [[소련]]에서 개최된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2위를 차지했던 피아니스트 류시쿤(劉詩昆)도 "문화대혁명 시기 고문과 투옥 생활을 겪었고, 6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감방 벽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그걸로 연습을 대신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이유로 문화대혁명 이후의 연주가나 작곡가들은 그 당시의 음악이나 어법을 일부러 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후 중국이 사상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에 들어 양판희의 연주가 다시 재개되기 시작했다. 다만 [[중국 정부]]도 문화대혁명 시기처럼 이들 양판희의 공연과 관람을 강제하지는 못하고 있고, 공연 횟수도 그 당시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져서, 일종의 [[추억팔이]] 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외에 [[중국공산당]]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 어록을 인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어록 구절에 가락을 붙인 어록가라는 혁명가요풍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 외 정부나 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서 이렇게 혁명가요의 아이디어를 빌려 노래로 만들었다. 물론 이 운동 자체가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마오쩌둥 찬양가도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 노래들도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평가절하되어 부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현재 중국의 [[국가(노래)|국가]]인 《[[의용군 진행곡]]》도 이 당시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곡의 작사자인 톈한(田漢, 1898~1968)이 문화대혁명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노래는 한동안 가사 없이 연주만 되는 곡으로 전락했다. [[1978년]]에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을 찬양하는 가사가 나오긴 했는데, 이때 [[중국인]]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 이 노래가 쓰일 당시 중국은 일제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의용군 진행곡]]》은 항일투쟁을 위해 만들어졌다. 가사가 바뀔 당시 '일제가 침략한 때를 벌써 잊은 것이냐'라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이후 [[1982년]]에 톈한이 복권되자, 원래의 가사로 돌아오게 된다. 결국 중국의 음악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후유증은 오늘날 중국의 대중음악계에도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2012년 대한민국의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는데 과거 [[문화대혁명]] 시절 대중음악계를 검열하는 바람에 실력 있는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이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싸그리 사라져버리는 공백이 있었고,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 실력이 있는 [[대만]]의 가수들에게 높은 순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에도 중국 대륙 출신의 가수들보다는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 중에 실력자들이 더 많고 인기도 더 많다. 결국 10억 인구의 중국 대륙 출신 가수들이 처참하게도 상대적으로 비주류가 되어버렸다. 원래 중국에서는 1930~1940년대 [[재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상하이]] 시대곡(時代曲)들이 크게 유행을 했었지만[* 사실 [[중국국민당]]은 이러한 시대곡들을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음악이라며 비판했다.], [[국부천대]] 이후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홍콩이나 대만 등지로 이주한 후, 중국은 일반적인 대중음악이라고 부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표현의 자유 제한과 검열이 극도로 심한 [[공산주의]] 국가의 환경에서, 대중음악이 제대로 발전을 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그 악명 높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중국의 대중음악계가 완전히 전멸해 버렸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대중가요들은 [[마오쩌둥]] 찬양가와 같은, 공산혁명가, 공산당 찬양가, 인민해방군가와 같은 것들이었다. 결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검열로 인해 중국의 대중가요계가 위축되고 완전히 퇴보하면서 날이 갈수록 대만의 대중가요계보다 인재풀이 크게 좁아졌다. 그러다가 1970~1980년대에는 개혁개방으로, [[광동어]] 노래와 대만 가수들, [[등려군]]이 음악계를 평정했는데, 문제는 이들은 중국 대륙 출신이 아니라 대만 출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1990년대에는 배우로 더 유명한 [[장국영]] 등이 가수 활동을 하면서 중화권의 가요계를 빛낸 적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중국 본토 출신이 아니라 대부분 홍콩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은 지금까지도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가수들을 불러오지 않으면 사실상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현재 중국 경제가 크게 발전함과 동시에 시민들의 문화 수준도 향상되면서, 중국의 대중가요가 질적으로 제대로 된 발전을 할 기미가 보이나 싶었으나 현실은 반대로 '''서방권 가수들과 [[K-POP]], [[라틴 팝]]''' 등이 오히려 중국의 대중음악계까지 완전히 점령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좁아터진 상황에서 중국을 대표할 유명 가수가 나올 인재풀이 더 좁아졌다. 그나마 [[힙합]] 쪽이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이긴 했는데 힙합마저도 [[중국공산당]]과 광전총국의 규제 검열로 많이 꺾였다.[* 2017년 랩 오브 차이나가 엄청난 대박을 터뜨리고 그동안 문화 검열도 잠시나마 유해지며 언더, 오버 실력파 뮤지션들이 빛을 보면서 힙합이 본격적으로 주류에 오를 기회를 잡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바로 중국공산당에서 검열을 시작하여 금지드립까지 치고 힙합 발전이 꺾였다. 이후 중국 힙합계선 사회비판, 풍자, 노골적인 머니스웩, 섹스어필 등은 상당히 보기가 힘들다. 랩 오브 차이나 출연 래퍼들도 다소 밝고 희망찬(...) 가사들로 나와야했고 [[크리스 우]]는 아예 중국혼(...)이란 제목의 국뽕요소가 가득한 랩을 랩 오브 차이나 프로듀서 공연에서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