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효세자 (문단 편집) === 사망 === 문효세자가 훙서하기 전달인 4월부터 전국적으로 유행병이 돌았다고 한다. 문효세자의 병이 깊어지자 종묘 사직에 2번이나 기도제를 올렸다.[[http://royal.aks.ac.kr/ContentsList/Desc?did=756&book=JSK_WR_K22932&page=1|#]] [[1786년]](정조 10년) [[5월 11일]][* 먼저 죽은 여동생(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녀)의 2주기가 다음 날인 5월 12일이다.] 5세(만 3세)에 [[홍역]]으로 훙서하였다. 문효세자가 훙서하고 [[종묘]], 영녕전, [[경모궁]]에 훙서한 사실을 고하는 글이 있다. 묘의 이름은 효창묘로 당시 고양군 율목동[* 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었는데 송림이 울창했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인 [[9월 14일]], 생모 [[의빈 성씨]]가 죽자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 옆에 묻어주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 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72XXXXXX8944|서울지명사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아버지 [[정조(조선)|정조]]가 정조선황제로 [[추존]]되면서 문효세자 역시 문효태자로 추존되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우선 왕이나 황제 추존에 따라 그 자손의 호칭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며, 이는 [[의소세손]]의 호칭을 세자로 추봉하는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grpId=&itemId=ST&gubun=book&depth=5&cate1=&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ST_Z0_A36_07A_18A_00130|과정]]과 그것이 특별한 은전[殊典]을 이유로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grpId=&itemId=ST&gubun=book&depth=5&cate1=&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ST_Z0_A36_07A_27A_00270|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의소세손의 호칭을 의소세자로 바꾼 기록은 분명하지만, 의소세자나 문효세자의 호칭을 태자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없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제사 때 표기를 '정조 선황제 제1자 문효세자'라고 한다.[[https://blog.naver.com/isdnnet/222389227381|#]] 이것에 대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정조(조선)|정조]] - [[순조]] - [[효명세자|문조(효명세자)]])의 계통을 잇다보니 방계 쪽인 문효세자를 태자로 추존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란 의견이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근거를 마냥 사실로 인정하기엔 약간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문효세자의 후손이 있으면 모를까, 1명도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될 가능성이 '0'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기 보다는 단순히 추존 왕이나 황제 추숭에 따른 자손들의 별도 추숭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을 뿐일 가능성이 높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효창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었다. 때문에 모자가 100보 가까이 나란히 묻히게 한 정조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자 옆에 묻혀있고, 의빈 성씨의 무덤은 2km 거리의 후궁묘의 빈·귀인 묘역에 있게 되었다. 문효세자의 사당은 문희묘인데. 원래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 근처에 지으려 했으나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 문효세자는 5월에 졸했고, 의빈은 9월에 졸했지만 그 사이에 윤7월이 있어 5개월 뒤이다.] 생모 의빈 성씨가 졸하자 [[종로구]] 안국동에 의빈궁(의빈 성씨의 사당)과 함께 지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 때인 [[1908년]](순종 2년), 재정을 아끼기 위해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신위를 땅에 묻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문효세자가 무사히 보위에 올랐다면 수렴 청정을 피하고 곧바로 친정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인 19세(만 18세)였다면 이복 동생 순조가 너무 어린 나이(11세, 만 10세)에 보위에 올라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 뒤에는 왕권이 약화되는 [[반남 박씨]](순조의 외가), [[안동 김씨]](순조의 처가) 등의 세도정치가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적어도 문효세자가 아니라 의빈이 낳지 못한 아이가 남자였다면 그래도 15세로 수렴청정은 피한다. 일반적으로 수렴청정은 15세에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문효세자는 어려서 죽었지만, [[효창공원]]에 그 흔적을 남겼고, 독립투사들의 묫자리를 잡아 준 것과 마찬가지이니 나름 역사에서 역할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