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물탄 (문단 편집) === 중세 === [[파일:Suraj-Kund-Temple-and-Pond-2.jpg]] 도시 남서쪽 외곽의 공터로 남아있는 옛 태양신 신전 (수라즈 쿤드) 시간이 지나며 도시의 이름은 말리 족의 땅이란 뜻인 말리스탄 혹은 물라스타나푸라로 바뀌었고, 축약되어 '물탄'이 되었다. [[바르다나 왕조]]를 거쳐 7세기 중반, [[신드]]의 아로르에 기반한 브라흐민 왕조의 차크가 일대를 정복했다. 차크는 아타쿠르를 물탄 총독으로 봉하여 북방 왕조들에 대한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641년 물탄을 방문한 구법승 현장은 화려한 태양신 사원[* 힌두 군주 지바윈이 세웠다 한다. 돔 밑에, 목재 권좌 위에 놓인 신상의 눈에는 루비가 박혀 있었다고.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은 전법륜인과 유사한 기안 무드라를 취했다 한다]에 5천축 모두에서 순례객이 와서 보배를 바친다고 기록했다.[* 금빛 신상 앞에서 여인들은 음악을 연주, 불을 밝히며 꽃과 향을 바친다. 자선의 집에서는 빈자와 병자에게 식음과 약을 제공하고, 항상 수천의 예배자가 있다. 신전의 4면에는 꽃이 가득한 정원이 있어 누구나 거닐 수 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의 [[시스탄]] 태수인 무할라브 이븐 아비 수프라는 664년부터 종종 펀자브로 침투하여 많은 포로와 함께 귀환했다. 이는 이슬람과 힌두 문명 간의 첫 충돌이었다. 711년 신드를 정복한 우마이야 조의 무함마드 이븐 알카심은 712년, 라자 다히르 치하의 물탄을 포위했으나 강한 저항에 부딪혀 포위는 장기화되었다. 원정군이 물자가 바닥나 철수가 논의될 무렵, 미상의 주민 하나가 접근하여 도시의 보급로인 지하 수로의 존재를 알려주며 이곳을 막아버린다면 물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무함마드는 그대로 행하였고, 식량이 바닥나자 물탄의 유력자들이 협상에 나서 항복하였다. 수비대는 전부 처형되고 그 처자식은 노예로 팔렸으나, 나머지 주민들은 인두세를 내는 조건 하에 기존 삶을 영위했다.[* 전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신상이 너무 생생하여 사람으로 착각한 후) 신전에서 330개의 궤짝에 담긴 20톤 혹은 133톤의 보물을 찾아 데발에서 바스라로 옮겼고, 관례대로 원정을 후원해준 상관인 알핫자즈 빈 유수프에게 전리품의 1/5를 보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성인 남성은 다 죽이고 이이들과 사제들 6천을 포로로 잡았다고도 한다.] 동시에 태양신 신전은 수입의 1/3을 바쳐야 했다.[* 참배객들은 형편에 따라 100 ~ 10000 디르함을 낸다. 그중 1/3은 무슬림들 (혹은 빈자들)에게, 다른 1/3은 공공시설 유지비, 나머지 1/3이 사제들에게 돌아갔다. 무함마드는 태양신의 신상이 부의 원천인 것을 알고 파괴하는 대신, 그 목덜미에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소고기 살점을 걸어 모욕하고 금을 압수하는 것으로 그쳤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