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물탄 (문단 편집) ==== [[할지]] & [[투글루크 왕조]] ==== [[파일:Tomb_of_Shah_Rukn-e-Alam_Multan.jpg]] [[파일:Tomb_of_Shah_Rukn_e_Alam_and_Mosque,_Multan.jpg]] 1320-24년에 세워진 수흐라와르디 수피 성인 루큰-에-알람 샤 (루큰 웃딘 압둘 파테흐) 영묘. 본래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가 자신의 영묘로 건설했다가, 술탄 등극 후 양도했다.[* 정확히는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양도, 1335년 루큰 웃딘 사후 안장된다.] 1296년 7월, 델리 술탄 [[잘랄 웃 딘 할지]]는 아와드 총독인 자신의 조카 겸 사위 겸 양자 [[알라 웃 딘 할지]]에 의해 시해되었다. 잘랄웃딘의 황후 (말카-이-자한)는 막내 루큰웃딘 이브라힘과 함께 델리를 탈출하여, 장남 아르칼리 칸이 총독으로 있는 물탄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11월, 어느정도 정권을 안정시킨 알라웃딘은 후환을 덜고자 물탄 원정에 나섰다. 혹시 모를 변고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에 남기로 한 그는, 동생 울루그 칸과 현지 출신의 자파르 칸에게 지휘를 맡겼다. 한편, 공격을 예상한 아르칼리 칸은 최대한 수비를 강화해 두었다. 그러나 3-4만의 원정군이 성을 완벽히 봉쇄하고 2개월이 흐르자, 가망이 없다고 여긴 코트왈 (수비대장)과 몇몇 성내 유력자들이 이탈하여 델리 진영에 가담하였다. 궁지에 몰린 아르칼리 칸은 명망 높은 수피 성인 루큰-에-알람 샤 (셰이크 루큰웃딘)에게 양측의 중재를 청하였다. 셰이크는 휴전을 성사시켜 아르칼리 칸과 루큰웃딘을 울루그 칸의 군영으로 데려갔고, 울루그 칸은 예를 갖춰 맞이하며 셰이크의 청에 따라 제장들과 포로들을 해하지 않기로 서약했다. 물탄을 접수한 울루그 칸은 다른 잘랄웃딘의 가족과 주요 지지자들을 체포하여 델리로 회군했고, 알라웃딘은 반대로 포로들에 대한 처벌 지시와 함께 누스라트 칸을 물탄 방면으로 파견했다. 둘은 아보하르에서 조우했고, 아르칼리 칸과 루큰웃딘은 실명되어 한시에 감금되었다. 아르칼리 칸의 아들들은 처형되었고,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장군 말리크 울르구와 말리크 아흐마드 차프도 실명되었다. 후자는 전 환후 등의 하렘과 함께 델리로 이송되어 누스라트 칸의 저택에 연금되었다. 그후 알라 웃 딘은 누스라트 칸을 와지르 (재상)에, 자파르 칸을 물탄 총독에 봉하여 논공행상을 하였다. 울루그 칸은 이미 제국의 2인자였다. 알라웃딘의 안정적인 통치 하에 도시는 재차 번영할 수 있었다. 14세기 초엽, 페르시아어 및 힌디어로 작문한 [[수피]] 작가 아미르 쿠스라우 (호스로)는 물탄 총독 칸 무함마드의 초청으로 도시를 방문해 시조를 남겼다.[* 대충 자신의 지혜로 물탄의 강물을 빛나게 했다는 애용이다] 당시 물탄은 인도의 관문이자 펀자비 지역 학문의 중심지였고, 서아시아에서 델리로 향하는 카라반과 학자들이 모두 거쳐가는 사통팔달의 도시였다. 1310년대 알라웃딘의 장남 [[쿠트브 웃 딘 무바라크 샤]]가 기존의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를 풀자, 지정학적 우위를 지닌 물탄 상인들이 곡물 등을 독점해 물가가 크게 오르기도 했다. ||[[파일:Shrine_of_Hazrat_Shah_Shams_ud_din_Sabzwari.jpg|width=356]]||[[파일:Shrine_of_Hazrat_Shah_Shamsuddin_Sabzwari.jpg|width=540]]|| ||||1330년에 세워진, 13세기 물탄의 이란계 수피 & 이스마일파 성인 샴스웃딘 사브제바리의 영묘 |||| 1305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데팔푸르 출신의 장군 기야스 웃딘 투글루크는 인근 물탄 총독에 봉해졌다. 그는 금요 사원에 자신이 타타르 (몽골)에 대해 28번 승리했다는 무용담을 새겼다.[* 민중은 그에게 '가지 울 물크' 칭호를 주었다] 이후 데팔푸르 총독으로 전임한 기야스 웃딘은, 1320년 술탄 무바라크 샤가 힌두 출신의 쿠스라우 칸에게 시해되자 거병하였다. 그는 각지의 총독들에게 합류를 청하는 격문을 보냈는데, 물탄 총독 무글라티는 거부했다가 기야스 웃딘의 친구 바흐람 시라즈가 봉기하려 하자 도주하다가 (기야스 웃딘 시기에 세워진) 수로에 빠져 사로잡힌 후 처형되었다. 다만 물탄 주둔군은 끝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과거 기야스 웃딘과 함께 활약했던 물탄 출신의 장군 아이눌 물트는 그의 편지를 받고 쿠스라우 칸의 군대에서 이탈해 은둔했다.[* 술탄 등극 후 기야스 웃딘은 아이눌 물크를 재차 장군으로 채용한다] 힘겨운 전투 끝에 기야스 웃딘은 쿠스라우 칸을 죽이고 [[투글루크 왕조]]를 개창했고, 내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한 신드의 이스마일파 국가인 숨라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타즈웃딘 말리크를 물탄 총독으로 봉하였다. 1326년 기야스 웃딘이 사망하자, 그의 물탄 재임기에 태어난 아들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계승했다. 다만 그의 치세에 물탄 인근 농촌은 지나친 과세로 피폐해졌고, 1328년 물탄 총독 키슐루 칸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기도 하였다. 14세기 중엽, [[니자리파]] 다이 (선교사) 피르 사드렛딘 샤하데브는 힌두 로하나 카스트를 개종시키며, 이스마일파 교리에 힌두교가 가미된 사트판드 신앙을 창안하기도 하였다.[* 1336년까지 남쪽 신드에 이스마일파 숨라 왕조가 잔존했기에 물탄에도 이스마일파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물탄을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킵차크 스텝에서 수입된 말들이 거래된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물탄은 노예 무역의 거점이었고, 이는 14세기 후반 [[피루즈 샤]]의 노예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1388년 피루즈 샤의 사후 투글루크 왕조는 쇠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