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뭄바이 (문단 편집) === 포르투갈령 봉베잉(1534 ~ 1661년) === ||[[파일:뭄바이 성채 인도.jpg|width=400]]||[[파일:뭄바이 성당 인도.jpg|width=300]]|| |||| 살세테 섬 서부의 마드 성채와 성 세례 요한 성당 ||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후 포르투갈 인들은 매년 인도로 향하였다. 그러던 1508년 말, 칸누르에서 발진한 프란시스쿠 다 알메이다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은 맘루크-구자라트 해군과 맞서기 위해 [[디우]]로 향하던 중 뭄바이 근해에 나타났다. 이듬해 구자라트 선단을 나포한 포르투갈 인들은 마힘 섬에 상륙하였다. 다시 항해하여 디우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포루투갈 측은 구자라트 술탄 바하두르 샤에게 마힘에 성채 건설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었다. 그러자 1517년 주앙 다 몬로요의 선단이 마힘에서 구자라트 함대를 격파하며 무력 시위에 나섰고, 1524년까지 수 차례 뭄바이 근해에 출몰하여 구자라트 선박들을 습격하였다. 1526년 포르투갈 인들은 울하스 강 하구 북안의 바사이에 공장을 세웠고, 1528년 구자라트-차울 전쟁을 틈타 마힘 요새를 빼앗았다. 1531년 디우 점령 시에도 포르투갈 인들은 마힘을 거치는 등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던 바하두르 샤는 결국 1534년 12월 바사이(바자잉) 조약을 통해 뭄바이 군도를 할양하였다. 따라서 이듬해 뭄바이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령 고아 총독부에 소속되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일대를 현지 발음인 뭄바이에서 음차한 봉베잉(좋은 소년)이라 불렀다. 뭄바이 군도가 상업적으로 최적의 거점이라 여긴 그들은 여러 요새들과 성당을 세웠다. 본래 뭄바이 군도의 중심은 서북쪽의 마힘 섬이었는데, 16세기 후반 일대를 임차받은 그라시아 다 오르타가 뭄바이 본섬 동남쪽에 봉베잉 요새(카사 다 오르타)를 세운 후 그곳이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뭄바이 본섬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만으로 보호받는 천혜의 항구였기에 포르투갈 뿐만 아니라 영국 역시 그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 탐내었다. 1580년 [[이베리아 연합]]의 성립으로 사실상 스페인에게 병합된 포르투갈의 해군력과 식민지 경영 능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1583년 첫 영국 상선들이 뭄바이 군도를 방문하였고, 1612년 영국 해군은 [[수라트]] 인근에서 벌어진 수왈리 해전에서 포르투갈을 격파하고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626년 영국 해군은 봉베잉 요새의 총독궁에 방화하였다. 식민지 당국은 1640년 살세테 섬 서남쪽, 마힘 섬과 접하는 곳에 아구아다 요새를 세워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1648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에 있어 영국의 지원에 의존했던 포르투갈은 더이상 인도양에서 영국과 경쟁할 명분도 의지도 없어졌다. 결국 1661년 영국은 막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되찾은 포르투갈과 혼인 동맹을 체결하며, 지참금 형식으로 탕헤르와 함께 뭄바이 본섬을 할양받았다. 따라서 1662년 가을, 신임 총독 아브라함 쉬프먼의 영국 함대가 당도하여 뭄바이 & 살세테 섬의 양도를 요구했으나 포르투갈측 총독은 인수를 거부하였다. 결국 1664년 영국 측은 뭄바이 섬만의 할양에 약속한 후에야 그를 양도받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