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냐 (문단 편집) === [[고대 이집트]] (메나트 쿠푸) === [[파일:이집트 힉소스.jpg]] 베니 하산의 고분 벽화. [[힉소스]] 인들의 이집트 도래를 묘사하여,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선왕조 시절 메나트로 불린 도시는 이집트의 16번째 노미에 해당되었고, 기원전 3100년 메네스의 통일 전까지 자치적인 도시 국가였다. 고왕국 시절에 일대는 오릭스 주로 불렸는데, 부근에 서식하는 오릭스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메나트는 나일 강을 통한 수운 외에도 [[홍해]] 연안에 상품을 하적하는 시리아 상인들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기원전 2550년 무렵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 [[쿠푸]]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후 메나트 쿠푸 (쿠푸의 요람)로 불리게 되었다. 고왕국의 멸망 후 1차 중간기 때에 메나트 쿠푸는 남쪽의 사우트 (아시유트) 처럼 사실상 독립하였다. 헤라클레오폴리와 테베 왕국의 다툼 속에서 현지 '오릭스 왕공'들은 중립을 유지하였는데, 바케트 3세에 이르러 테베의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따라서 테베 주도의 통일과 중왕국 설립 후에도 해당 가문은 계속해서 오릭스 주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권력은 11왕조 무렵 가장 흥성하였다. 메나트 쿠푸의 왕공들은 나일 강을 굽어보는 동안의 석회암 절벽에 무덤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현대 미냐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베니 하산에 9기가 남아있다. 12왕조 들어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가 중앙 집권화 정책을 펴며 메나트 쿠푸 왕공들은 권력을 잃었다. 이후 2차 중간기 때에 일대는 나머지 하이집트와 함께 [[힉소스]] 인들에게 점령되었다. 현지 귀족들은 힉소스 15 왕조를 도와 테베의 16, 17 왕조에 맞섰다. 기원전 1552년 반격에 나선 테베 왕국이 힉소스와 처음으로 주요 전투를 벌인 곳도 메나트 남쪽 교외였다. 1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카모세는 메나트를 '아시아인들의 둥지로 만든' 페피의 아들 테티를 격파하였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카모세의 동생 아모세 1세가 북진하여 기원전 1540년경 힉소스 인들을 이집트에서 영구히 축출한다. 신왕국 때에는 사우트에 밀려 별 주목을 받지 못한 메나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들어 많은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