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라 (문단 편집) === [[중국]] === [[춘추전국시대]] [[초평왕]]은 사후 자신의 시체를 당시 불로장생약으로 여겨진 [[수은]]에 담가서 매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수은의 유독성이 미생물의 부패작용까지 억제하여, 이런 부드러운(…) 미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초평왕에게 원수를 진 [[오자서]]가 오나라 대군을 데리고 초를 초토화시키는 와중에 이 무덤을 파내 볼링공 잡듯이 눈알을 파내고 구리 채찍으로 시체를 수백대를 쳐서 가루로 박살내 버렸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미라는 종종 발견되는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회격묘에서 발굴되는 빈도가 높고, 미라 생성의 원리도 비슷하다. 이외에도 [[타클라마칸 사막]] 등 중국 서부 쪽에는 사막 기후때문에 미라가 되어 발견되는 시신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후난성]]에서 발견됐으며, 마왕퇴한묘(马王堆汉墓,[[마왕퇴]])에서 발굴된 여성의 미라([[신추 부인]])가 굉장히 유명하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d/Xin_Zhui.jpg|마왕퇴한묘 미라의 생전 모습 복원 인형]]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d/Xin_Zhui_3.JPG|미라의 모습(열람 주의)]]. 마왕퇴한묘의 미라는 워낙 시신이 잘 보존되어 의학자들이 해부한 뒤 보고서도 작성되었다. 습기찬 토양에서 관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는데, 이 수분이 당시 풍습대로 매장직전 관에 부어진 [[에탄올]]과 반응하면서 관 자체가 방부액체로 채워진 결과가 되었다. 상상 이상으로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다만, 우연히 형성된 방부액으로 인해, 물에 퉁퉁 불은 것처럼 미라가 부어 있어 비위가 약하면 보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분석 결과 마왕퇴한묘의 미라는 [[한나라#s-3.2|한(漢)나라]]시대[* 대략 2200년 전이다.] 인물의 미라로, 미라의 신원은 [[전한]](前漢)의 공신인 대후 이창의 부인인 '[[신추]](辛追, 한어병음:Xin Zhui)이고, 50세에 사망했고 사인이 [[심근경색]]이며, 동맥경화[* 동맥을 조사했을때 동맥이 심하게 막혀있었다.], 담결석, 당뇨, 심장병, 고혈압, 허리디스크, 비만을 앓았고 죽기 직전 [[참외]]를 먹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위장에서 참외씨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물론 이 무덤 역시 대량의 석회와 흙으로 밀봉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부패가 억제된 것도 있다. 발굴 당시 여러 서적, 의복뿐만 아니라 부장품이었던 [[과일]]류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 때문.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여성의 아들이 먼저 급사하였고 아들의 죽음을 본 이 여성이 자신이 죽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무덤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이런 밀봉이 가능했다고 한다. 다만 남편 [[이창]]과 아들의 유해는 모두 썩어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창의 무덤은 [[도굴]]되어 밀봉이 사라졌고 아들의 무덤은 모친의 무덤에 비해 밀봉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웨난이 쓴 《마왕퇴의 귀부인》 또는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를 참조할 것. 아래는 신추 부인의 아들이 누구인가에 관한 분석이다. {{{#!folding [ 신추 부인의 아들은 전한의 제후 이희인가? 펼치기 • 접기 (터치 • 클릭)] '''1. 신추 부인의 아들은 이희가 아니다.''' 신추 부인의 급사한 아들이 전한(前漢)의 [[제후]] [[이희]](利豨)는 아닌 게, 이희(利豨)는 기원전 165년에 죽었는데 묘의 연대가 기원전 168년이다. 이는 이승률의 '죽간 · 목간 · 백서, 중국 고대 간백자료의 세계에서 인용했다. 책 <마왕퇴의 귀부인>이나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에 실제로 신추 부인의 아들이 이희라고 서술되어 있는지, 혹은 왜 신추 부인의 아들이 이희라고 추정했는지 근거가 필요하다. '''2.신추 부인의 아들은 이희가 맞다.''' <마왕퇴의 귀부인>에서는 부거유의 설을 근거로 하여 이희의 무덤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부거유가 발표한 이래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설이다. 무덤주인의 사망년도와 사서에 기록된 사망연도의 차이에 대해서 당시에도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부거유의 답변과 추론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3호묘 주인에 대해 나를 비롯해 모두가 '이희가 아니라 당연히 이희의 형제'라고 생각했다. (중략) 7~8년에 걸친 혼신의 연구 끝에 우리가 3호묘의 주인에 대해 내린 원래의 결론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했다. (중략) 논문은 주로 3호묘의 관제, 명정, 견책에 기록된 [[미인]]과 재인, 견책에 기록된 알자, 목간의 낭중, '대후가'라는 붉은 글씨와 '대후가승'이라는 봉니, 견책의 '가리', 견책의 '환자','수중', 거기제도, 종졸병마제도 등의 분야에서 무덤 주인의 신분이 열후인 것을 증명했다. '''<[[사기(역사책)|사기]]>와 <[[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제2대 대후 이희가 [[한문제|한나라 문제]] 15년(기원전 165년)에 죽었다는 기록과 3호묘 [[목간]]에 기록되어 있는 문제 12(기원전 168년)년의 기록 사이에 3년의 차이가 나는 일은 당연히 사기와 한서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즉, 이희 모친이 문제 15년에 죽었는데 이를 이희의 사망 연대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중략) "[[제후]]는 2중이다"라는 것은 제후는 3개의 관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3호묘는 바로 3중의 관으로 제후의 관제에 정확히 부합한다. 장사에서 이미 발굴된 서한 초기 제후의 무덤을 보면 모두 관이 3중이다. 따라서 3호묘의 주인은 당연히 제후여야 한다. (중략) 3호묘의 명정 윗부분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고 아랫부분에는 교룡이 그려져 있다. (중략) 한나라 때의 장례 제도에 의거하면 3호묘의 주인은 당연히 제후여야 한다. 3호묘의 견책에 무덤 주인이 '가승 1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서 백관공경표>와 <후한서 백관지>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제후는 '가승 1인'을 둘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고한다. 이는 무덤 주인이 열후인 것을 말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견책에 무덤 주인이 "88명의 미인과 20인의 재인", "환관 9인"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후궁제도의 규정에 의하면 제후와 황제만이 '미인' '재인' '환관'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무덤 주인의 지위가 최소한 열후라는 것을 말한다. '''<[[사기(역사책)|사기]]>와 <[[한서]]> 같은 명저에도 착오가 있을 수 있기 마련이다.''' <한서 고혜고후문공신표>는 대후 이창을 '여주창'으로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 예이다. 이 착오는 1974년 마왕퇴 2호묘가 발굴되고 '[[장사]][[승상]]', '대후지인', '이창'등의 인장 3점이 출토된 후에야 비로소 한서의 이 착오가 바로 잡혔다. <사기 혜경간후자년표>는 '이창(利蒼)'을 '이창(利倉)'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사기>의 기록도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 경우처럼 고고학 발견은 이따금 역사 문헌 기록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양옥승은 자신이 지은 <사기지의>라는 책에서 <사기>가 연대 표기에서 100여 곳 이상의 오류를 범했는데, 그중 '표(表)'에서 연대 표기의 오류가 가장 많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 [[고황후 여치|고후]](高后)의 기록에 "4년에 [[태위]]를 삼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기 강후세가>에는 "[[한혜제|혜제]] 6년에 태위관을 설치하고 발(勃)을 [[태위]]로 삼았다. 10년만에 고후가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한서 백관공경표>에 "혜제 6년 강후 [[주발]](周勃)이 다시 태위가 되었고 10년에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혜제 6년부터 여후 8년까지는 딱 10년인데, 만일 여후 4년에 태위를 설치했으면 단지 5년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의 연대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열후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서열이 반드시 이웃한 경우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상황이 2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서열 66위인 양평후의 공이 서열 54위인 평정후와 비교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열 99위인 송자후의 공이 서열 92위인 역후와 비교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예외는 <사기>와 <한서>의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런 연대 표기상의 착오와 오기는 <사기>와 <한서>의 표에 매우 많다. 1호묘는 2,3호묘와는 별도로 발굴됐기 때문에 지층 관계에서 볼 때 이 두 무덤보다 늦다. 1호묘에서 출토된 니반냥전(泥半兩錢)과 3호묘 전토에서 출토된 반냥전은 문제 시기의 사수반냥전(四銖半兩錢)과 같다. 이 때문에 두 무덤의 연대는 마땅히 매우 근접하며, 그 차이가 불과 몇 년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3호묘는 무덤에서 출토된 연대가 적힌 목간을 근거로 문제 12년에 매장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호묘는 문제 15년 전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호묘의 주인은 제2대 대후 이희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사망 연도는 바로 <사기>와 <한서>에 기록된 이희의 사망 연도, 즉 문제 15년이다. 그리고 3호묘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장 방식을 근거로 3호묘의 주인은 바로 제2대 대후 이희이며, 한나라 문제 12년[* 무덤에 '12년'이라고 기록된 목간이 있다.]에 장사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와 <한서>에서 이희 모친의 사망 연도인 문제 15년을 이희의 사망 연도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 확인할 수 있다.'''}}} 2011년에 [[명나라|명(明)나라]] 시대의 인물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상류층 여성으로, 약 700년 전의 미라[* 대략 태조 [[이성계]]가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키는 150cm대라고 한다. 관 안에 물이 차 있었으며, 학자들은 관 안의 산소 농도가 낮아져 생성된 자연 미라로 추정했다. 손가락에 착용한 녹색 옥반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눈썹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의 복식과 생활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물게 위의 신추부인과 혼동되는데, 이 미라는 영어권에서 보통 'Ming dynasty mummy(명 왕조 미라)', 'Wet mummy of Ming dynasty(명 왕조의 젖은 미라)'로 불린다.[[http://mongolschinaandthesilkroad.blogspot.com/2011/03/archaeologists-find-ming-dynasty-mummy.html|미라 사진이 포함된 관련 영문 글]]. 중국 [[내몽골자치구]] 등에서는 [[요나라]] 시기의 [[거란족]] 미라가 발견되기도 한다. 실제로 요나라 2대 황제였던 [[야율덕광]]이 사망한 이후부터 [[거란족]]들은 미라화하는 "건시(시신을 말려 장례식하는 것)"라는 풍습을 했었다. 야율덕광(요 태종)은 후진을 멸망시켰으나 하필 여름인데다가 폭염으로 인해 기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거란군들은 나중에 철수했고, 이 때 야율덕광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가 나중에 죽게 되어 이후 요나라에서는 왕의 장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는데, 당시 요나라의 태후였던 단완태후 술률평([[야율아보기]]의 황후)은 죽은 사람이어도 시신은 한 번이라도 봐야한다며 시신을 수도인 [[상경|상경임황부]]에 운반하라고 하였으나 덥고 습한 기후여서 운반 중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시신이 썩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 때 어느 한 요리사가 방법을 제시했는데, 유목민들은 소나 양의 고기를 저장할 때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을 사용해서 저장하니 그 방법을 사용해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왕의 시신을 해부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보니 결국 이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는 훗날 요나라 거란족들의 장례 풍습으로 유지되었다. 물론 아무나 했던 건 아니었고, [[귀족]]이나 [[황족]]들 한정이었다. 그래서 귀금속으로 만든 가면을 비롯한 수많은 부장품들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