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라 (문단 편집) === [[한국]] === [youtube(5xoYDmAMgss)] 한국에도 미라가 존재한다. 한국의 미라는 주로 자연적으로 건조된 미라인 것이 특성이다. [[조선]]시대 성행한 [[회곽묘]]는 그 환경으로 인해 우연한 미라 생성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생성된 미라와 달리 신체적 특징은 물론 착용하고 있던 의복과 장신구, 심지어 체내의 [[기생충]], [[배설물]]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비록 겉은 완전 건조된 미라여도 체내 수분이 남아 있어, 인위적으로 생성된 미라와 달리 CT, MRI 등 영상촬영도 가능하다고 한다. 원래 회곽묘는 미라를 만들려고 조성한 게 결코 아니다. 유교에서는 시체가 자연스럽게 썩어야 한다고 여겼고 단지 썩기 전까지만 나무 뿌리나 벌레, 짐승들로부터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 석회로 곽을 감싼 것이다. 그런데 석회는 물과 반응해서 열을 방출하는 특성이 있어서, 주변 수분을 흡수한 회곽묘의 석회에서 섭씨 200도 가량의 열을 방출해 곽과 관 내부를 살균하고 건조시켜 자연 미라를 만드는 일이 었었다. 즉 의도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1965년에는 의병장 [[김덕령]]의 무덤을 선산으로 이장할 때 시신이 미라 상태인 채로 발견되었는데, 문중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려 있다고 생각해 사진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이때가 사진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지라... 겨우 사진기를 구해 가져왔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고 그동안 공기 중 [[세균]]과 접촉하여 부패가 진행되어버렸기에 별 수 없이 화장 처리해서 묻어버렸다고 한다. 다만 의복 등은 보존 처리가 되어서 충장사에 전시되어 있다. 1998년 [[경북]] [[안동]]에서 이름 모를 무덤을 이장하다가 400여년전 미라 2구를 발견했다.[* 일선문씨가 먼저 발견된 후, 20여일 뒤 손자 이응태의 묘가 발견됨] 이 사람은 이응태(1556~1586)라는 사람과 조모인 일선 문씨로 이응태의 무덤 안에는 아내가 쓴 편지가 입관한 이응태의 위에 덮여있었으며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편에게 한글로 편지를 쓰며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편지 내용에 아들의 어릴적 이름인 ‘원이’는 드러나 있지만 아내에 대해 추적할만한 근거는 전무했다][* 고성이씨 참판공파 족보에 따르면 이응태의 후사는 외아들 이성회 뿐이며 이가 아마도 편지속 ‘원이’로 추정된다] 더불어, 스스로 [[짚신]]까지 만들었는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짚신 곳곳에 묶어 만들며 남편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 이 편지는 2007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 게재된 바 있다. 자세한 내용과 국어사적 내용은 [[이응태 묘 출토 편지]] 문서 참고. 2001년에는 [[해평 윤씨]] 무덤을 이장하던 중 약 400년 전 조선시대 소년 윤호(尹鎬,1690?~1695.5?)의[* 사실 소년미라가 윤호인지 확실한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해평윤씨 족보를 살펴보면 윤호의 이름 옆에 관직명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있는데 다섯살 아이가 동일인 일까 과연] 미라를 발견했다. 땋은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까지 시신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약 6살 정도의 소년으로, 옷이 함께 발견되어 문헌으로만 남아있던 아동 복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연구진들의 분석 결과 사망 원인은 [[천연두]]로 인한 합병증이라고 한다. 정확한 인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해평 윤씨의 족보에는 '윤호'로 기록되었지만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한동안 정확한 이름을 짓지 않았다.]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통 '단웅이 미라'로 불린다고 한다.[[https://m.youtube.com/watch?v=5xoYDmAMgss|영상]] 2002년에는 [[파평 윤씨]] [[여성]]의 미라가 발견된 적이 있다. 친정에서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임신]]한 채로 발견된 미라라고 한다. 사망 원인은 정확히 [[자궁파열]]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조부가 거물이라[* [[문정왕후]]의 오빠이자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이다. 동생인 윤원형에 비해서는 유명하지 않지만, 정3품 벼슬을 한데다 그의 딸은 [[인종(조선)|인종]]의 [[후궁]]이 되기도 하는 등 거물이라면 거물.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9B%90%EB%9F%89|출처]]] 제대로 관을 쓴 결과 의도치 않게 미라가 되었다. 이 여성의 미라는 피부에 수분이 남아있었고, 살아있는 사람의 CT나 MRI 사진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대단히 좋았으며, 그런 탓에 보통 난산으로 인한 사망 후 뱃속에 차는 부패가스로 인해 복중의 [[태아]]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 [[임신]]한 상태로 사망하면 부패가스가 태아를 밀어낸다. (일명 '관내 [[출산]]') 그리고 조선의 예법에 따라 한 관에 두 사람을 묻지 않아서, 과거에는 뱃속에 태아가 있으면 염하는 사람이 산도(질)를 통해 꺼내어 따로 묻었다. 다만 이처럼 출산 중 죽은 경우는 태아가 커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묻은 듯하다.]에도 불구하고, 출생 직전의 태아도 아무런 손상없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2007년에는 [[강원도]] [[강릉시]]에서 [[임진왜란]] 시기 [[왜군]]과 싸웠던 최씨 장군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생전 폐가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폐에 좋다고 약으로 쓰이는 포황(蒲黃, [[부들]]의 꽃가루)이 장기에서 많이 검출되었다. 사망 당시 60대였다. 2012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서 260여년 전[* 기원후 1752년으로, [[정조(조선)|정조]]가 태어난 해이다.] 사망한 팔회당 이시항 선생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영조 때 벼슬을 지낸 이시항 선생은 발견 당시 계급에 맞는 관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수염을 비롯한 머리카락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안동은 오래 전부터 세가 좋은 가문이 많아 이렇게 보존이 잘 된 미라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http://www.ugn.kr/m/news.asp?seq=45608|이시항 선생의 미라 사진이 담긴 관련 기사]]. [[2014년]] [[11월 3일]]에는 [[대전광역시]] [[서구(대전광역시)|서구]] [[서구(대전광역시)#s-5.2.3|갈마동]]에 위치한 도솔산[* 이쪽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겐 원래 평범한 동네 산책 코스다.]에서 단양 우씨의 묘를 이장하던 중 [[조선 시대]] [[중종(조선)|중종]] 때 궁중 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에서 봉사직 등을 지낸 우백기의 미라와 습의 등이 발견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막 발굴된 참이라 박물관에서 바로 보존처리를 하고 향후 연구자료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379년 이상[*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한창일 때 혹은 그 이전에 사망한 사람이다. 이걸로 보아 [[명종(조선)|명종]] 시절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된다.]된 [[광주 이씨]] 문경공지파 덕열의 부인인 청풍 김씨의 미라가 발견됐다. 사망 당시 70대였다. [[http://www.yonhapnews.co.kr/local/2016/10/21/0806010000AKR20161021098500055.HTML|청풍 김씨 미라 사진이 담긴 관련 기사]]. 2017년의 뉴스 기사에 따르면, 그냥 연구실 냉동고에 '''방치'''되는 미라가 있어 문제가 된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iBgGJJqZ1pk|관련 뉴스]].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발견된 조선 전기 여인의 미라를 통해 [[사서#s-2|사서]]의 기록을 검증한 사례가 있다. 미라의 장 속 소화물을 분석한 결과 굴을 통해 감염되는 [[굴(어패류)#s-7|참굴큰입흡충]]의 알이 발견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하동 일대에서 신선한 [[굴(어패류)|굴]]이 많이 생산되어 중앙으로 상납했다고한다. 참굴큰입흡충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에 기생했는지도 확인한 셈이다. 과거에는 미라가 발견되어도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발견 자체가 후손들이 산소를 이장하느라 파묘했을 때 이루어지는게 대부분이고, 연구자들에게 알릴 경우 [[부검]]으로 시신의 뼈와 살을 분해할 것이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모욕이자 [[불효]]라고 여겨 미라가 나와도 알리지도 않고 그냥 다른 곳에 재매장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으면 운이 좋은 편.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CT나 MRI 등 시신을 분해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술이 나와 있고, 사람들 인식도 달라져서 시신을 기증하는 후손도 종종 있다. 한편 이러한 특성 때문에 [[조선왕릉]] 가운데 [[세조(조선)|세조]] 이후의 [[왕]]들과 [[왕비]]들의 시신이 미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반 사대부의 묘에서도 잘 보존된 미라가 발견되는데, 더 엄격한 격식을 갖추어 능을 만들고 관리했다면 그 가능성은 높다. [[어진]]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왕릉에 잠들어있는 왕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볼 수도 있다.[* 1만원권의 [[세종대왕]]을 비롯해서 어진은 대부분 후대에 상상으로 그린 것. 특히 [[6.25 전쟁]] 당시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된 게 많아서 그렇다. 대부분이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어진으로 초상이 남은 조선 왕은 [[이성계|태조]], [[세조(조선)|세조]], [[원종(조선)|원종]](정원군), [[영조]], [[철종(조선)|철종]], [[고종황제|고종]], [[순종황제|순종]] 뿐이다.] 하지만 조선왕릉의 발굴 조사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씨]] 종약원에서 강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영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투탕카멘#s-2.3|투탕카멘]] 미라와 [[잉글랜드]] [[리처드 3세#s-7|리처드 3세]]는 그의 두골 덕분에 훗날 얼굴을 복원해 볼 수 있었다.] 현대에 와선 역사적인 유물과 사례들 말고도 때론 방치되어 [[고독사]]한 사람이 미라화가 되어 발견되어 [[충격과 공포]]의 이슈가 되기도 한다. 2013년에는 [[부산광역시]]의 한 주택가에서 당시로부터 5년 전 고독사한 어느 할머니의 시신이 미라화된 채 발견되어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시신은 겨울옷을 겹겹이 싸입은 채 발견되어 세간에 여러 충격을 주었다. 이웃들의 왕래가 없었던 탓에 누구도 할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급격한 발전을 이룬 탓에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여진족]]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http://luckcrow.egloos.com/m/25552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