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륵사 (문단 편집) === 왕흥사와 미륵사 === [[왕흥사]]의 터가 [[부여군]]에서 발굴되기 전에는 미륵사와 왕흥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오갔다. >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이 미륵사다. >----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왕흥사의 별명을 미륵사라고 한다면, 익산의 미륵사와 부여의 미륵사가 같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법왕(백제)|법왕]]이 600년에 왕흥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흥사]]와 미륵사의 관계를 헷갈리게 하는 기록이다.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기를 허가하였다. >---- >《[[삼국사기]]》백제본기 권27 법왕 2007년에 발견된 왕흥사 사리함에는 왕흥사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보다 23년 앞선 577년에 창건되었다는 명문이 있다. >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 정유년 2월 15일 [[위덕왕|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 >《왕흥사 사리함 음각문》 백제왕 창이 바로 [[위덕왕]]이고, 위덕왕 재위시기 중 정유년은 서기 577년이다. 따라서 왕흥사 창건주는 무왕이 아니다. 이미 당대에도 기록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부여의 왕흥사 창건은 무왕과 전혀 관계가 없음이 명확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