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륵사 (문단 편집) === 동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M_6348.jpg|width=100%]]}}}|| 반쪽이나마 탑의 형체는 유지되고 있었던 서탑과 달리, 미륵사지 동탑은 사진과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근현대에는 이미 땅에 묻힌 기단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소실된 뒤였고, 탑의 부재만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미륵사지 주변에는 민가가 여럿 있었고, 그들 입장에선 탑의 터는 그저 돌무더기에 불과했기에 여러 곳에서 돌들을 가져가 필요한 데 쓰면서 많은 부재들이 소실되었다. 이 부재들은 추후 탑의 층수를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동탑이 저렇게 복원된 사연은 이렇다. 1970년대 들어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전국의 고대 유적 정비가 유행처럼 번졌고, 당시 [[박정희 정권]]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주시]]의 신라 문화재들에 대한 보수 및 복원 사업이 진행되자, 익산군(당시)에서는 "미륵사지 석탑도 저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미륵사지 석탑은 일제가 임시조치로 부어놓은 콘크리트 때문에 상태가 영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손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기술 수준과 예산이 매우 부족했기에 섣불리 시도할 수 없었고, 그러던 중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미륵사지를 조사하던 중 동탑의 터를 발굴해냈다.[* 그 덕에 1980년부터 미륵사지를 본격적으로 발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탑 복원까지는 가지 못했기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은 익산군의 숙원사업이 됐고, 그러던 차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공약대로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려 했는데, 서탑을 복원하자니 당시로서는 여러 문제로 인해 복원하려다가 되려 훼손시킬 염려가 컸다. 이에 차라리 터만 남은 동탑을 복원하여 나중에 서탑을 해체한 후 복원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큰 반발 없이 수용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탑이 복원 대상으로 낙점되었다. 그 후 탑을 어디다 복원할지 정하는 과정에서 탑의 터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현재의 [[국립익산박물관]] 자리에 탑을 복원하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멀쩡한 터가 있는데 왜 다른 곳에 복원하냐는 격렬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본래의 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공사는 1991년에 시작되어 1993년에 완료되었다. 복원 전부터 학계의 논란이 일었던 동탑의 복원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크나큰 비판 여론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당시 거의 모든 문화재위원들이 고증이 불가하다며 반대했지만 졸속으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원된 동탑의 형상은 반쯤 쓰러진 서탑의 모습과 사방에 흩어져 있었던 부재들을 연구한 결과물인데, 미륵사의 두 석탑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내용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두 석탑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고, 불국사만큼은 아니라도 예를 들면 높이 또는 층수가 달랐거나, 모습이 서탑과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동탑 복원은 그걸 무시하고 무작정 서탑과 똑같은 모양일 거라 단정하고 시작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석조물은 돌을 정으로 일일이 쪼아 만든 거친 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부족했던 예산[* 본래 견적은 60억 정도였지만, 반영된 예산은 29억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원래는 23억이었다가 더 준 것이다.] 때문에 복원할 때 하얀 [[화강암]]을 기계로 깎아내어 탑을 쌓았고, 결국 기존의 서탑과 부조화가 심하고, 표면 질감이 너무 매끈하여 상당히 부담스러운 건축물이 되었다. 이를 두고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허망과 허상의 복원탑'이라 하였다. >미륵사지 동탑이야말로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최악의 사례로 기록될 겁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 >[[유홍준]], 2004년 미륵사지석탑(서탑) 해체 조사보고회에서 다만 당시 동탑 복원에 참여했던 문화재 복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도 많은 고충이 있었다. 터의 부재를 조사해보니 미륵사지 뒤편 미륵산 및 익산 각지에서 채굴했음이 밝혀져, 최대한 원형대로 하기 위해 돌을 운반해왔다. 그런데 돌은 정말 최상급이었으나, 문제는 질이 너무 좋아서 정으로 10~15번 쪼면 다시 갈아야 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석수가 일일이 쪼는 전통방식대로 했다간 최소 20년 이상 걸린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이를 완전히 재현하려면 예산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익산 지역의 숙원사업 자체가 좌초될 수 있었다. 이에 복원이 아니라 북한식 개건(開建)에 가까운 작업이 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현대적인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2020년대 이후에는 문화재 복원의 원칙이 생겨 [[유럽]]에서 [[대성당]]을 건설할 때마냥 수십 년 세월이 걸린다 해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개발도상국]]을 벗어나 중진국에 접어든 지 얼마 안 된 당시 시점엔 국민정서상 용납이 안 되었고, 경제 발전에 쓸 비용을 수십 년 세월 동안 탑 하나에 투자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 동탑도 1993년 세워진 지 벌써 [age(1993-01-01)]년이 지났다. 그 동안 탑신과 상륜부에는 때가 타고 달아놓은 풍경은 떨어지는 등 점차 낡아가면서, 초창기의 지나치게 새 것 같은 현대적이고 인공적인 모습에서 점점 주변 풍경에 동화되었다.[* 과거 동탑을 대차게 비판했던 전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개정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나름 봐줄만해진 동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또한 복원공사 중인 서탑으로 미륵사지를 소개하긴 좀 그랬는지, 서금당지 안에서 찍은 동탑이 그동안 미륵사지를 소개하는 이미지로 사용되곤 했다. 물론 2019년 5월부로 서탑이 복원공사를 마치고 공개되었으니, 얼마 안 가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화재'가 아닌 '복원품'이기에 딱히 보호받지 않으므로 탑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내부도 복원된 서탑과 같은 실내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라고 체험하기 딱 좋다. 서탑처럼 사리함이 존재했는지는 불명. [[백제]] 당시에 있었다 하더라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동탑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해체되었기 때문에 소실되었을 것이다. 탑을 복원하면서 원 부재 중 35개를 추려 복원에 사용했는데, 탑을 둘러보면 보이는 유난히 거뭇거뭇한 부분들이 그것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