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사 (문단 편집) === 성체성사의 집전자와 거행자 === >이렇게 성찬례 제정해 주셨네. >오로지 사제만 그 직무 받아서 >몸과 피 모시고 나누어 주면서 >당신의 백성을 섬기게 하셨네. >----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Panis angelicus|거룩한 잔치들(Sacris solémniis)]] 중. >성찬례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이 모임을 앞장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대사제이시다. 모든 성찬 거행을 보이지 않게 주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주교나 사제는 그분을 대신하여('''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in persona Christi Capitis''') 모임을 주재하고, 독서 후에는 강론을 하며, 봉헌물을 받아들이고, 감사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모두들, 곧 독서자, 예물 봉헌자, 성체 분배자, 그리고 '아멘'으로 참여를 표현하는 전체 회중은 각자 나름대로{{{-2 (suo modo)}}} 전례 거행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48항.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1348|원문 링크]].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48항에서는 suo modo가 "각자 나름대로"라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의 평신도 학자인 최현순 데레사 교수{{{-2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그레고리오 대학교]] 교의신학 박사)}}}에 의하면, "라틴어 suo modo는 '그 고유의 방식으로'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은데, '나름대로'라는 말이 갖는 소극적 뉘앙스 때문이다."{{{-2 (최현순, [[https://www.pauline.or.kr/bookview?code=02&subcode=01&gcode=bo1007594&cname=|『시노달리타스』]], 바오로딸, 2022, p.195}}} 성체와 성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부분이 미사와 다른 그리스도교 예식의 근본 차이라면, 형식이 성립하기 위한 여러 차이 중 하나는 바로 직무 사제가 미사를 집전한다는 점이다. 직무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2 (in persona Christi)}}} 미사를 집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는 신부가 오만하게 처신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교리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사제이시고, 다른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일 뿐"[*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45항.]이라는 의미이다. "사제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축성하는 것"[* 바티스타 몬딘{{{-2 ''Battista Mondin''}}}, 『성 토마스 개념사전』{{{-2 ''Dizionario Enciclopedico del Pensiero di San Tommaso d'Aquino''}}}, 이재룡 안소근 윤주현 옮김,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2021, p.348.]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아무리 작은 공동체에서 거행하는 작은 규모의 예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미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무 사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가톨릭에서는 평신도 가족끼리만 모여 기도한다고 '가정미사'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가족끼리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는 신앙활동을 '가정예배'라고 부르는 개신교와 다른 점이다. 본당 사목구 주임 사제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며 사목하는 본당 사목구 내 구역 신자들의 공동체를 [[공소(가톨릭)|공소]]라고 한다.[* [[https://cbck.or.kr/Glossary/Search?swd=%EA%B3%B5%EC%86%8C|천주교 용어집]].] 공소가 존재하고, 공소 예식이 존재하는 이유도 사제 수가 부족해서이다. 사제의 수가 적고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는 한 명의 사제가 모든 공동체의 미사를 다 담당하기가 물리적으로 힘들다. '주일이나 의무 축일에 미사 참례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신자는 공소 예식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74조 3항.]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성체)의 성사를 이룰 수 있는 집전자는 유효하게 수품된 사제뿐이다. >---- >『교회법』 900조 ①항. [[https://cbck.or.kr/Documents/Canon/Read/900|원문 링크]].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 신자들이 사제를 소중히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한 장소에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있다고 해도, 직무 사제가 단 한 명도 없다면 미사 거행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여전히 사제 수는 부족하다. 가톨릭 교회가 신자들에게 사제를 위한 기도를 자주 바치라고 권하는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신도가 미사에서 아무 역할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어떻게 전례를 거행하는가?''' > >교회는 지상에서 사제직을 받은 백성으로서 전례를 거행한다. 전례 안에서 각 신자는 성령으로 하나 되어 각자의 고유한 임무에 따라 행동한다. 세례 받은 이들은 자기 자신을 영적 희생 제물로 바치고, 성품을 받은 봉사자들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섬기고자 받은 품계에 따라 전례를 거행하며, 주교와 사제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한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235항.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159460&path=110704172346|전자책 링크]].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미사의 집전자{{{-2 (minister)}}}는 신부이지만, 거행{{{-2 (celebrate)}}}은 직무 사제인 신부와 보편 사제인 신자{{{-2 {{{[}}}정확히 말하면, 이는 평신도라는 의미가 아니라 직무 사제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곧 신부는 직무 사제이면서 동시에 보편 사제이다.{{{]}}}}}} 모두가 각각 "그 고유의 방식으로"{{{-2 (suo modo)}}} 한다. 따라서 평신도는 분명히 미사 중 역할이 있다. >'''교회는 성찬례의 희생 제사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는가?''' >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신비체의 지체들의 제사이기도 하다.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된다. 희생 제사로서 성찬례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의 죄에 대한 보상으로도 바치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적이거나 현세적인 은혜를 얻으려고도 바치는 것이다. 천상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봉헌에 결합된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281항.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159460&path=110704172346|전자책 링크]].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신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삶이 그리스도의 삶과 결합되고, 그것이 십자가 대속의 제사에서 제물로 봉헌된다. 가톨릭 교리가 모든 신자들을 '보편 사제'라 하는 것은 단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립서비스가 아니라, 평신도가 정말로 삶을 제물로 봉헌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제사를{{{-2 (祭)}}} 맡은{{{-2 (司)}}} 자', 곧 '사제{{{-2 (司祭)}}}'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보편 사제직이 성품된 신부들의 직무 사제직과는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47항.] 보편 사제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미사의 희생 제사적 의미도 밝혀진다. 가령 '고통'이라는 주제를 보자. 신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고통은 미사를 통해 AD 1세기의 십자가 대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되어 제물로 봉헌된다. 이를 통해서 '고통'은 무의미하고 알 수 없는 현상을 넘어 진정으로 가치를 가진다. 만약 미사가 희생 제사적 성격이 없다면, 혹은 신자들은 보편 사제가 아니라 단지 미사를 관람하는 관객에 불과하다면, 고통은 그냥 고통일 뿐 그 어떤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남남이 되며, 십자가형은 그저 끔찍한 처형일 뿐 대속의 희생 제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는 미사를 통해 현재화되고, 신자의 삶은 '현재화된 십자가 희생 제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삶과 결합되어 제물이 된다. >성찬례는 우리의 고통을 희생 제사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겪으신 것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대속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가 당신께서 이루신 일에 참여케 하는 신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통이 구원의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고통을 겪고 돌아가셨다. ... 구원을 가져다주는 고난은 우리의 위대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다. 성령의 힘에 의해 우리의 고통은 사랑을 정화한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겪는 고통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살아 있는 제뮬은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당신의 방식을 취하시도록 이끈다. >---- >스콧 한{{{-2 ''Scott Hahn''}}}, 『네 번째 잔의 비밀』{{{-2 ''The Fourth Cup''}}}, 가톨릭출판사, 2023, pp.206-209. 가톨릭의 보편 사제직 교리는, 성찬례의 제사성을 부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만인사제설'을 부정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 그 누구도 사제가 아니다'라는 논리적 결론을 함의한 개신교와 달리, 회중을 정말로 '제사를{{{-2 (祭)}}} 맡은{{{-2 (司)}}} 자', 곧 '사제{{{-2 (司祭)}}}'로 본다. >신자들은 ... 사제의 손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제와 하나 되어 흠 없는 제물을 봉헌하면서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법을 배우고, 중개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이 갈수록 하느님과 일치하고 또 서로서로 일치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하여야 한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 거룩한 공의회」 48항. [[https://cbck.or.kr/Documents/Council|원문 열람]].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증거와 당신의 봉사를 계속하기를 바라시기에, 당신의 성령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온갖 좋은 일과 완전한 일을 하도록 끊임없이 재촉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명에 밀접히 결합시키신 평신도들에게 당신 사제직의 일부도 맡기시어,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영신적인 예배를 드리게 하셨다. 그러한 까닭에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성령으로 도유된 사람들로서 놀랍게도 언제나 그들 안에서 성령의 더욱 풍부한 열매를 맺도록 부름을 받고 또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 생활, 가정생활, 일상 노동, 심신의 휴식은, 성령 안에서 그 모든 일을 하고 더욱이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뎌 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이 되고{{{-2 (1베드 2,5 참조)}}}, 성찬례 거행 때에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 또한 이와 같이 평신도들은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살아가는 경배자로서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 인류의 빛」 34항. [[https://cbck.or.kr/Documents/Council|원문 열람]].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헌장」은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 곧, 기도, 사도직 활동, 가정생활, 노동, 휴식 등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 모든 것이 영적 제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삶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성령 안에서' 살아낼 때 그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탁월한 제물이 된다. 따라서 영적 제물이 되지 못하는 삶의 순간이란 죄 말고는 없다. 물론 죄 이후에 발해지는 통회는 하느님께서 더없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의회 문헌에서 언급한 일상의 제물을 바치는 이는 평신도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 >최현순, [[https://www.pauline.or.kr/bookview?code=02&subcode=01&gcode=bo1007594&cname=|『시노달리타스』]], 바오로딸, 2022, pp.116-11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