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사 (문단 편집) === 감사와 기념의 희생 제사인 미사 ===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단 하나만이 존재한다. 십자가 대속만이 유일한 참 제사라는 것은 신약 성경의 깊은 확신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로 우리를 위하여 바치신'{{{-2 (에페 5,2)}}} 다음부터는 다른 희생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다{{{-2 (히브 10,18)}}}. 그런데도 가톨릭에서는 미사를 '제사' 혹은 '희생 제사'라 부르는데,{{{-2 {{{[}}}'제사'와 '희생 제사'는 라틴어를 비롯한 서양말들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라틴어에서는 둘 다 Sacrificium이고, 영어에서는 둘 다 Sacrifice이다.{{{]}}}}}} 이는 역사상 개신교에서 가톨릭을 비판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도 오직 십자가 대속만이 '유일한' 제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45항.] 미사를 '제사'라 부르는 것은 미사가 '십자가 대속'이라는 '유일한 제사'의 재현{{{-3 (라: repraesentat, 영어: re-present)}}}, 현재화{{{-3 (라: praesens reddit, 영어: make present)}}}, 기념, 적용이기 때문이다. >'''성찬례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현재화)하고, 이를 기념하며, 그 결과를 실제로 적용시키기 때문에 희생 제사이다.''' > >우리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량을 실현하시려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중개자로서 돌아가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단 한 번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셨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으로 그 사제직이 끝나서는 안 되었으므로(히브 7,24.27),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최후의 만찬에서 사랑하는 당신 신부인 교회에게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눈에 보이는 제사를 남겨 주고자 하셨다. 그 제사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이루어진 피의 제사가 재현될 것이며, 그 기념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 구원적 효과는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죄의 용서에 적용될 것이었다.[* (교리서 내 주석) 트리엔트 공의회, 제22회기,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 제1장: ''DS'' 1740.]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6항.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1366|원문 링크]].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이는 '사제'라는 단어의 용법과도 상응한다. '제사'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리상 그리스도교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곧 오직 십자가 대속의 희생 제사를 봉헌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사제일 뿐이다.{{{-2 (참고: 히브 5,10; 6,20; 10,14)}}} 그러나 신부들과 신자들이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47항.]함으로써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을 각각 이룬다. >속량을 위한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 번에 완결된 유일한 제사이다. 그러나 그 제사는 오늘날 교회의 성찬 제사 안에 현존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그 유일성이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직무 사제직을 통해 현존한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사제이시고, 다른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일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성 토마스 데 아퀴노]], 「히브리서 주해」, c. 7, lect. 4, Opera omnia, 21권(파리, 1876), 647.]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45항.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1545|원문 링크]].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당연히 직무 사제{{{-2 (신부)}}}가 일상에서 '사제'라 불리고 보편 사제{{{-2 (신자)}}}가 성경에서 '사제'라 불리는 것{{{-2 (1베드 2,9)}}}은 히브리서가 확신하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직무 사제직에 대해서는 개신교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신자들이 보편 사제직을 이룬다는 것은 개신교에서도 결코 부정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개신교 신자라도 이를 히브리서가 확신하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과 모순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사'라는 용어도 똑같은 원리로 미사에 적용할 수 있다. 실제 사례로 이미 AD 100년경의 초대 교회에서도 미사{{{-2 (성찬례)}}}는 제사{{{-2 (θυσία)}}}라고 불렸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십시오{{{-3 (εὐχαριστήσατε)}}}.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3 (θυσία)}}}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 >『디다케』{{{-3 (AD 100년경)}}} 14장 1절, 정양모 역주. > >※ εὐχαριστήσατε: eucharistēsate >※ θυσία: thysia 따라서 미사를 가리키는 '희생 제사'라는 말은 십자가 대속이 '유일한 희생 제사'임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역사(役事)가 역사(曆史) 속에서 계속됨을 충만하게 드러낸다. 특히 현대인들이 놓치기 쉬운 요소가 있다. 오늘날 '제사'라는 말에서 느끼는 '고리타분하다'는 인상과 달리,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신자들을 종교적으로 고양시키고 가슴 벅차게 하는 매우 즐거운 신심 행위였다. 심지어 [[출애굽기|탈출기]]에서 이집트를 탈출하려는 동기를 모세는 정말 간단명료하게 '제사를 지내고 싶어서'라고 밝힐 정도였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탈출기 5장 3절. [[https://bible.cbck.or.kr/Knb/Ex/5|원문 링크]].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바로 이런 이유로 바빌론과 로마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다인들에게 재앙으로 취급됐다. 그런데 만약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한 바가 '이제 제사는 끝장났으니 그리스도인들은 제사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였다면, "십자가 대속 때문에 정작 그리스도인들이 구약만도 못한 신심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매우 이상한 결론이 나와버린다. 그 어떤 유다인이라도 제사가 사라지는 건 재앙으로 생각했지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최고의 제사가 십자가에서 행해졌고,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십자가 대속으로 "다 이루어졌다"{{{-2 (요한 19,30)}}}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사를 '유일한 희생 제사의 현재화'로 생각해야 히브리서의 논지{{{-2 (대속 효과의 충만함)}}}와 그리스도교적 상식{{{-2 (신약의 신심 행위는 구약을 넘어선다)}}}과 유다인의 신심{{{-2 (제사가 사라지는 건 재앙이지 축복이 아니다)}}}에 모두 부합한다. 만약 미사가 '희생 제사'라 불리는 것이 십자가 희생 제사의 유일성을 부정한다면, 신자들을 사제라 부르는 베드로 1서는 오직 십자가 대속만을 제사로 보는 히브리서와 모순된다는 부당한 결론이 나올 뿐이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것을 분명히한다. >성찬의 희생 제사가 지닌 이러한 보편적 사랑의 측면은 구세주 자신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그저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다.”{{{-2 (루가 22,19-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시는 것이 당신의 몸과 피라고만 단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희생 제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셨으며,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곧 바쳐지게 될 당신의 희생 제사를 성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영속되는 제사적 기념이며, 동시에 또 이와 분리할 수 없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친교의 잔치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2항.] >교회는 구원의 희생 제사에서 자신의 생명을 끊임없이 길어 옵니다. 교회는 신앙으로 충만한 기억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접촉을 통해서 이 희생 제사에 다가갑니다. 이 희생 제사는 축성된 집전자의 손으로 그 제사를 드리는 모든 공동체 안에 성사적으로 영속하면서 언제나 새롭게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대의 인류를 위하여 단 한 번에 이루신 화해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 제사와 성찬의 희생 제사는 동일한 제사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7항.]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은 이 희생양을, 내일은 또 다른 희생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희생양을 바칩니다. 그러므로 희생 제사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 지금도 우리는 단 한 번 바쳐졌으며 결코 없어지지 않을 희생 제물을 바칩니다.”[* 「히브리서 강론」(In Epistolam ad Hebraeos, Homiliae, Hom.) 17,3: 「그리스 교부 총서」(Patrologia Graeca) 63,131.]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며, 그 희생 제사에 다른 것을 덧붙이지도, 그것을 늘리지도 않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제22회기, 지극히 거룩한 미사의 희생 제사에 관한 교리(Doctrina de ss. Missae Sacrificio), 제2장: 「신앙, 도덕에 관한 선언, 규정, 신경 편람」(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1743: “그때 십자가에서 자신을 봉헌하셨던 분께서 바로 지금 사제들의 직무를 통하여 하나의 동일한 희생 제물로서 자신을 봉헌하고 계신다. 봉헌의 방식만이 다를 뿐이다.”] 되풀이되는 것은 그 제사를 기념하는 의식, 곧 “기념의 표명”{{{-2 (memorialis demonstratio)}}}[* 비오 12세,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1947.11.20.: 「사도좌 관보」 39(1947년), 548면.]이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하나이며 결정적인 구원의 희생 제사가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현존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찬 신비의 희생 제사적 성격을 십자가와 별개인 독립된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해골산의 희생 제사를 단지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12항.[[https://cbck.or.kr/Documents/Pope/400107|#cbck]][[https://archive.is/bj0LD|#archive]] 이 희생 제사가 '감사'{{{-2 (eucharistia)}}}와 '기념'{{{-2 (anamnēsis)}}}의 희생 제사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 말씀에서 이 제사를 '감사'{{{-2 (eucharistia)}}}와 '기념'{{{-2 (anamnēsis)}}}의 제사라고 말하고 있다. >^^23^^ὁ κύριος Ἰησοῦς ἐν τῇ νυκτὶ ᾗ παρεδίδετο ἔλαβεν ἄρτον ^^24^^καὶ '''__εὐχαριστήσας__''' ἔκλασεν καὶ εἶπεν· τοῦτό μού ἐστιν τὸ σῶμα τὸ ὑπὲρ ὑμῶν· τοῦτο ποιεῖ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__ἀνάμνησιν__. >---- >{{{[}}}로마자 전사{{{]}}} ^^23^^ho kyrios Iēsous en tēi nykti hēi paredideto elaben arton ^^24^^kai __eucharistēsas__ eklasen kai eipen· touto mou estin to sōma to hyper hymōn· touto poieite eis tēn emēn __anamnēsin__. >---- >^^23^^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__감사를{{{-2 (eucharistēsas)}}}__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__기억하여{{{-2 (anamnēsin)}}}__ 이를 행하여라.” >---- >코린토 1서 11장 23-24절. [[https://bible.cbck.or.kr/Knb/1Cor/11|원문 링크]].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다음은 그 각론이다. '''감사 제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원문 열람''' || ||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1360|{{{#008000,#ccffcc 1360항}}}]]''' || ||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1361|{{{#008000,#ccffcc 1361항}}}]]''' || 성찬례를 의미하는 희랍어 [[https://hellas.bab2min.pe.kr/hk/euxaristia?q=eu)xaristi%2Fa%26&form=eu)xaristi%2Fa%26&l=ko|εὐχαριστία{{{-2 (eucharistia)}}}]]는 문자 그대로는 '감사'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행위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48항.] 이 에우카리스티아{{{-2 (εὐχαριστία)}}}라는 "명칭의 유래에 관해서 가장 합당한 가설은 다음과 같다. 유다교에서 회식을 시작할 때, 가장 또는 주빈이 빵을 들고 찬양기도{{{-2 (berakah, בְּרָכָה)}}}를 드렸다. 이 말을 그리스어로 옮길 때 찬양이라는 뜻을 지닌 에우로기아{{{-2 ([[https://hellas.bab2min.pe.kr/hk/eulogia?q=eu)logi%2Fa%7C%26&form=eu)logi%2Fa%7C%26&l=ko|εὐλογία]])}}}로 직역할 수도 있지만, 감사로 번역되는 에우카리스티아{{{-2 (εὐχαριστία)}}}로 의역할 수도 있다. 시편의 경우를 보아도 찬양 시와 감사 시는 그 구조와 내용이 거의 같다. 그래서 마르코 계열의 최후만찬 기사에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발췌자 주석) λαβὼν ἄρτον εὐλογήσας{{{[}}}labōn arton eulogēsas{{{]}}} -마르 14,22]{{{-2 (마르 14,22=마태26,26)}}}이라고 표현한 반면, 바오로 계열에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발췌자 주석) λαβὼν ἄρτον εὐχαριστήσας{{{[}}}labōn arton eucharistēsas{{{]}}} -루카 22,19]{{{-2 (1코린 11,23~24=루카 22,19)}}}이라고 표현했다."[* [[손희송]], 『일곱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p.144.]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신경]]을 통해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임을 고백한다. 그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교회는 미사 성제에서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 희생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4항.] '''기념 제사'''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원문 열람''' || ||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1362|{{{#008000,#ccffcc 1362항}}}]]''' || 앞서 발췌한 1코린 11,23-24의 구절에서 보듯, 성찬례는 한국어 기념(=기억)으로 번역되는 ἀνάμνησις{{{-2 (anamnēsis)}}}의 제사이다. 라틴어로는 memoria, 영어로는 memorial로 번역된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기념(기억)'은 통상적인 의미의 기념(=기억)보다 훨씬 강한 의미의 단어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기억이란 과거의 일을 단순히 정신적으로 회상하고 기억한다는 의미 외에 예배에서는 과거의 사건, 특히 [[출애굽기|출애굽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재현하고 체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2 (탈출 12,14~20; 신명 6,20~25)}}}."[* 손희송, 『일곱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p.145.] 특히 미사가 신약의 파스카 제사이며, 구약의 파스카가 출애굽 사건 '기념'{{{-2 (anamnēsis)}}}이라는 걸 감안하면, '기념'은 그 자체로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결부된 단어라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성찬례에서 말하는 기억{{{-2 (anamnēsis)}}}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3항.]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현재화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4항.] >그리스 교부들은 성체성사에서 나타나는 '기억' 개념과 함께 예수 시대에 유다교에서 모든 축제일을 통해 자명하게 기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즉, 지난 사건은 과거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지나간 것의 형태로 현재 안에서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축제를 지내는 이스라엘 백성과 통교하는 것이다. '기억'은 이스라엘에서 역사책을 넘기는 것이나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떠올리는 것 그 이상이다. 기억은 먼저 이스라엘에서, 그다음에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계약의 하느님이 하시는 행동을 자신의 행동과 계획, 생각하는 것이나 고통당하는 것으로 옮기는 것이다. >---- >칼-하인츠 멘케{{{-2 ''Karl-Heinz Menke''}}} 신부, [[https://m.pauline.or.kr/?pId=FMGD0020&code=02&subcode=,B&gcode=bo1008447&cname=book|『가톨릭교회의 교회론 -성사성-』]]{{{-2 ''Sakramentalität: Wesen und Wunde des Katholizismus''}}}, 조한규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22, p.200. 성찬 전례의 [[미사/성찬 전례#성찬 제정과 축성문|성찬 제정과 축성문]] 순서 다음에 "신앙의 신비여!"를 기도한다. 이어서 나오는 사제의 감사 기도는, 감사 기도 어느 양식을 사용하든, 그 미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기념함을 언급한다. 그리고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함을 고백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