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얀마/역사 (문단 편집) == 버간(파간) 왕국 (1044~1287) == 버간 왕조는 보통 파간(Pagan) 왕조로 알려져 있다. 버마어의 알파벳 표기법의 혼선이 심해서 버마어 발음과 표기가 상이한 기존 표기법과, 현지 발음과 비슷한 새로운 표기법의 차이가 심하다. 아직까지 혼선이 심하지만 새로운 표기법이 정착되어 가는 듯하다.[* 단, 이원복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에선 '바간 제국'이라 한다.] 버간 왕조는 849년에 성립되었다고 하나 전설과 뒤얽혀서 정확히는 알 수 없고, 그나마 역사적으로 뚜렷해지는 것은 11세기 아노야타 왕(제위 1044~1077) 때이다. 아노야타는 아노라타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노야타 왕은 버마족을 통합하고 버마족의 전통신앙인 낫 신앙을 정리하였고 몬족의 승려 신 아라한을 통해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아노야타 왕은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하고, 남쪽의 몬족 도시인 타톤에 불경을 요청하였다. 거기에 타톤이 거부하자 타톤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불경을 삥뜯었다고 한다.(…) 다만 실제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전성기를 맞고 있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조가 테나세림 일대로까지 확장을 하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gan-kingdom.jpg]] 이렇게 미얀마 남부 몬족의 도시들을 병합할 수 있었지만, 몬족은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버마족에 저항하였다. 이후 역사를 보면 버마족이 공격해서 합병하고, 몬족이 독립하고, 버마족이 진압하고, 몬족이 태국으로 탈출하고, 또 다시 버마족이 합병하는,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이후 동남아 전역을 막론한 무역망의 쇠퇴로 버간 역시 침체기에 접어든다. 나다웅먀 왕(재위 1210~1234) 때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그에 따라 왕권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다웅먀의 뒤를 이은 차스와 왕(재위 1234~1250)은 부패한 아리(Ari) 승가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정을 확보하려 했지만, 민중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하고 국정 운영을 세자 우즈나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우즈나 역시 사냥 다니기에 바빠 국정을 다시 신하들에게 위임했고(…) 이는 권신 야자틴잔을 필두로 한 조정 대신들의 권력이 강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우즈나 왕(재위 1250~1254) 사후 야자틴잔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태자 타히투 대신 첩 소생의 나라티하파티(재위 1254~1287)를 옹립했다. 그러나 왕권을 되찾고 싶어하는 나라티하파티와 야자틴잔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마침내 나라티하파티는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야자틴잔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나라티하파티는 자신이 건립한 파고다의 비문에 ""3600만 병력을 지휘하고 3000명의 후궁을 거느리며 300그릇의 반찬으로 식사를 한다""는 글을 새겨 넣는 등 왕의 권위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이 타이밍에 나타난 게 바로 [[원나라]].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나라티하파티는 원의 신종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자를 처형하며 운남을 선제 공격했지만 원의 기병 전술에 대패한다. 1287년 항복을 타진하러 가던 나라티하파티가 왕자 티하투에게 살해당하며 버간은 사실상 멸망. 타가웅을 위시한 북부 지방은 원의 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다. 남부의 몬족은 [[한타와디 왕국]]이라는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수도를 따서 버고 왕조라고도 하지만,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인다. 중북부는 샨족 저항군이 원을 몰아내고 잉와를 수도로 [[잉와 왕국]]을 건설한다. [[코에이]] 게임([[징기스칸 시리즈]])에서 자주 보이는 아바(Ava)가 이 도시이다. 이로써 250여년간 미얀마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