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축 (문단 편집) == 평가 == [[양희]]는 미자중을 찬함(贊麋子仲)이라는 계한보신찬의 평가에서 '안한장군은 온화한 용모로, 어떤 때는 인척이 되고, 어떤 때는 빈객이 되었다. 이 사람은 훌륭한 신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미축이 유비에게 올인한 시점은 유비가 여포에게 뒤통수를 맞아 근거지를 잃고 알거지 신세로 떠돌아다닐 때로, 보호가 필요해서 유일한 선택지인 유비를 고른 것이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많다. 미축은 서주의 명사로, 근거도 없는 [[유비]]한테 올인할 필요 없이 그냥 서주에서 [[여포]] 곁에 있었어도 됐고 [[원술]]에게 붙었어도 되었다. 어딜 가든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한 명성과 지위, 인맥이 있는 인물이었다. 조조는 실제로 미축을 직접 천거했고, 엄청난 부호에다 중앙 정권에 천거될 정도로 제법 이름이 나 있는 명사여서 유비 '따위'에게 기댈 이유가 없다. 미축은 울며 겨자먹기를 한 게 아니라 분명히 유비를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했다. 현대에서는 기껏해야 [[간손미]]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실제론 삼국지라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누구보다도 과감한 도박을 한 자가 바로 미축이었다. 지나가던 방랑군벌 유비를 만난 뒤, 미축은 자신이 평생 살아오던 서주를 바쳤고, 조상 대대로 모아오던 재물을 바쳤으며, 스스로는 물론이고 두 동생까지 당시 아무것도 없던 유비의 길에 몸을 던지게 했다. 조조 휘하에서 중앙 권력으로 진입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평생을 살아오던 서주 땅을 떠나, 끝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올랐다. 이쯤 되면, 유비라는 존재를 믿고 모든 것을 던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촉한이라는 나라는 곧 미축이라는 반석 위에서 세워졌다. 어쩌면 여기에 조조 일생 최대의 실책이자 악행인 [[조조의 서주 침공|서주대학살]]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데, 시기적으로 미축이 처음 유비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은 도겸이 서주를 양도할 때이다. 즉 서주대학살 직후이면서 동시에 조조의 서주 침공이 현재진행형일 때라는 것. 그리고 유비는 본인 스스로가 말하였듯이 조조의 반대되는 정치적 포지션을 잡는 것을 한평생 전략으로 내세웠다. 자신의 고향을 파괴한 조조에게 유비가 맞서주니 그를 지지하는 것이 미축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런 그를 한동안 알고 지내면서 더 큰일을 해낼 인물이라 판단함에 따라 전폭적인 지원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