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무구 (문단 편집) == 생애 == 1369년에 아버지 민제와 어머니 [[여산 송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392년에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할 때 가담하였으며 1398년에 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민무질과 더불어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이방원과 [[이숙번]]이 만나도록 주선하였다. 당시의 공적으로 민무구는 여강군에 봉해진다. 1401년에 중군 총제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402년에 참지승추부사에 임명되며 복귀하였다. 1405년에는 참찬을 지냈고 1407년에 [[의안대군(이화)|이화]]로부터 민무질, 신극례 등과 함께 외척이 되어 지나치게 교만하고 방자하다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당한다. 탄핵당한 부분이 왕이 경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었지만 민무구의 불충은 완벽한 사실이 되었다. >'''태종''' : '''임금에게는 아들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하였느냐?''' >'''민무구''' : '''그렇사옵니다, 전하! 세자 외에는 영특한 아들이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옵니다.''' 태종의 삼촌인 이화는 민무구의 발언에 대해 왕실의 자손을 제거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결국 민무구는 민무질과 국문을 당한 후에 연안으로 유배되었다. 이후에도 공신, 백관, 대간, 형조 등으로부터 법에 따라 다스려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갔다. 태종은 하륜에게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하륜은 가볍게 처벌해도 된다고 답하였다. 하지만 태종이 "곧은 말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목적은 숙청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11월 11일에는 민무질과 함께 직첩이 거둬지고 21일에는 민제의 요청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이후에도 꾸준히 사사하라는 상소가 올라오고 1408년 10월 16일에는 옹진으로 옮겨진다. 1409년 10월 5일에 민무질과 함께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1410년 3월 17일에 민무질과 같이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아 사사당한다. 남들이 슬퍼하는 와중에 기뻐하였고 남들이 기쁜 와중에 실망한 기색을 나타냈다는 죄목은 대중들이 우습게 볼 가능성이 높으므로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이 죄목이 되었다. 민무구의 죄는 누나인 원경왕후도 변호할 수 없는 중죄이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사망한 후에도 태종은 동생들인 민무휼과 민무회를 주시하다가 결국 사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