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병돈 (문단 편집) === 예편 이후 === 이후 [[경민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아시아엔이라는 군소 인터넷 언론에서 글을 기고하고 있는 등[* 탄핵 정국때는 우병우를 비판하기도 했으며, 보수인사로는 드물게 친박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다시 강연을 다니고 있다. 근데 최근에 계엄령 문건 사건이 터지자 또다시 쿠데타는 안 된다며 조현천을 사정없이 깠다. 사실 민병돈은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5.18 민주화운동과도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내로남불이 아니다.]의 주로 군사전문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일체의 공직 제의를 뿌리치고 40년 전 마련한 허름한 집에서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하나회였음에도 6월 항쟁 무력 진압에 반대한 인물로 최소한의 애국심과 정의감은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18년 8월 14일 [[PD수첩]]에 등장하여 근황을 알리는데 '''1987년 계엄문건'''을 공개한다. 2019년 4월 13일에 상처(喪妻:아내를 여읨)했다.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중풍에 걸린 아내를 20년동안 간호했다고 하며, 본인도 국립묘지 안장[* 민병돈은 하나회였기에 승진에 있어 득을 보았지만, 12.12 군사반란이나 5.18 민주화운동과 연관이 전혀 없었기에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있으며 군인연금도 수령하고 있다. 다만 12.12 반란 때 17사단 연대장으로 부대가 혹한기 훈련중이었고 보안사에 있는 [[허화평]]에게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고 묻긴 했지만 허화평은 어차피 북괴가 내려온 게 아니니까 그냥 훈련 진행 고대로 하면 된다면서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단장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고 한다. 하긴 본인부터 하나회 성골인 전두환계인데도 전혀 계획언질을 받지 않았으니 허화평에게 확인한 후에야 알았다. 5.18 때도 해당 부대에 연대장으로 그대로 재직중이어서 휘말릴 일이 전혀 없었다. 대신 국보위에 가서 전경 도입에 앞장서면서 시위 현장 군부대 출동을 원천 차단하면서 1987년 6.29 선언에 공을 세운다.] 대신에 아내와 같이 살던 집 마당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2021년]] [[10월 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사망하자 후배인 전 [[수도방위사령관]] [[안병호(군인)|안병호]] 예비역 중장의 권유로 조문하였다. 사실 상 32년 만의 재회인 셈이다. [[http://kor.theasian.asia/archives/300963|출처]] 이후 전두환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조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