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제(레) (문단 편집) ==== 청조의 지원군, 복위 ==== 이와 동시에 부반념은 탕롱에서 할거 및 자립을 도모하였으나 응우옌반후에가 병사를 내어 부반념을 기습해 살해하였다. 응우옌반후에는 응오반서(吳文楚)가 대신 부반념의 무리를 거느리도록 하였다. 후 레 왕조의 구원 요청 서신이 청나라의 남녕(南寧)에 도착하자 청나라의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 순무(巡撫) 손영청(孫永淸)은 이를 건륭제에게 상주하였다. [[건륭제]]는 [[손사의]]를 파견해 안남(安南, 베트남)으로 출병하도록 하여 후 레 왕조의 회복을 시도하였다. 청나라의 대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이 베트남에 전해지자 떠이선 군은 크게 놀랐고, 분분히 무너져 흩어졌다. 민제는 선남(山南)의 인마를 규합하였고, 민제의 동생 레주이따 또한 뚜옌꽝, 흥호아(興化) 일대에서 유신(遺臣)들을 규합해 청나라군에 협조하였다. 소식이 탕롱에 전해지자 떠이선 군의 장수 응오반서는 탕롱이 방어하기 어려움을 알고 성을 포기한 뒤 땀디엡산(三疊山, 닌빈성과 타인호아성 경계에 위치)으로 물러났다. 손사의는 청군을 이끌고 탕롱에 진입하였고, 민제도 탕롱으로 와서 손사의를 방문하였다. 손사의는 군영에서 건륭제의 조서를 낭독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새수(璽授)를 민제에게 주고 그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민제는 나라를 되찾은 뒤 일체의 행동이 손사의의 제약을 받았다. 민제는 명의상 안남국왕이었지만 실제 모든 권력은 손사의의 수중에 있었다. 또한 손사의가 있었으므로 민제는 조서를 반포할 때 함부로 자신의 찌에우통 연호를 사용하지 못했고, 청나라의 건륭 연호를 사용하였다. 민제는 매일 손사의의 군영에 가서 그를 방문해야 했고, 정치 전반에 대해 손사의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나가서 행차할 때도 의장대가 없었고, 다만 문신 및 무장 십여 명이 따랐으며, 탕롱의 백성들은 민제의 행차를 보고서도 그가 황제임을 거의 몰랐다. 우연히 민제를 알아본 사람들은 모두 몰래 안남에 이렇게 비굴한 황제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며 비난하였다. 손사의는 민제를 접견하지 않을 때에는 간단하게 전령병을 시켜 일이 없다고 통보하고 민제를 돌려보내 쉬도록 했다.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은 모두 실망하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떠이선 군에 붙은 관원들을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고, 민제는 이에 그들 관원들을 투옥시키거나 면직시켰다. 민제가 막 복위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와서 의탁하였는데, 민제는 모든 사무를 손사의가 관리하도록 하니 손사의는 도리어 이들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였다고 질책하였다. 청나라군은 스스로 공이 있다고 여기고 베트남인들을 업신여겨 심지어는 모욕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민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진행할 때 다만 자기를 따라 도망쳤던 사람만 대우하였으므로 기타 공이 있는 대신들은 중용을 받지 못했다. 이 일은 유신들의 마음을 잃게 만들었다. 또한 민제는 속이 좁은 성격이어서 종실의 여인들 중 떠이선 왕조의 장수들에게 시집가 임신한 이들이 있자 민제는 사람을 시켜 그들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숙부 세 명의 발을 도끼로 잘라내어 궁시(宮市)에 두고 대중들이 보도록 하니 인심이 불안해졌다. 황태후 응우옌티응옥또가 까오방에서 탕롱으로 돌아왔는데 민제가 한 행위를 보고는 화가나서 궁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이후 응우옌후이뚝(阮輝宿)이 권유하자 비로소 궁에 들어가 거주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