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족 (문단 편집) === 민족은 실재하는 개념이다 === (동)아시아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공동의 언어·혈통·문화공동체라는 객관적 요소에 동포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더해져 공고해진 실체이다. 즉 양 요소가 서로 맞물리면서 민족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동포의식이라는 결정적 요소의 완성은 상대적으로 그 시기가 늦다고 볼 수 있으나[* 한민족의 경우 개화기~일제강점기.] 공동적인 언어·혈통·문화공동체라는 요소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유럽의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 이전부터 상당히 진하게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것이 근대에 민족의식과 함께 (동)아시아의 근대적 민족주의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족이라는 것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 요소들 중 일부만 비판하고 그 일부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혈통과 민족의식의 문제인데, 민족회의론자들은 흔히 생물학적-인종학적 혈통이 아시아권의 민족의 정의에서 생각보다 중요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의식은 여타 요소와 맞물려 나타났다. 언어의 경우에는 분명 근대의 활판인쇄술과 표준어의 보급으로 소통이 되지 않던 방언들이 일체화하는 경향을 나타내었으나, 그것이 즉슨 민족이 없었으며 완전히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중간다리를 생략하고 단정한 것다. 여기에 기존에 가졌던 언어·혈통공동체적인 요소도 분명 나타난다. 위의 회의론에서 언급한 [[하플로그룹]]을 얼핏 보면 민족과 혈통이 별 관계가 없다고 보이지만 하플로그룹을 오해한 측면도 있다. 하플로그룹의 각 하플로들은 대다수가 [[구석기]]시대에 분화된 것이고, 아무리 민족에서 혈연을 강조한다 한들 대다수의 [[환빠]]들 조차도 그 기원을 구석기시대까지 올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하플로들은 3~6만년전 분화했다.] 한국의 경우를 들면, [[중국]]에는 [[만주족]]을 제외하고 사실상 전무한 O2b가 30%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하고 일본에는 20~40%를 차지하는 D2가 5%정도에 불과하는 등 혈통적으로 차이를 분명 보이고 있다. 다만 그 경향이 지역에 따라서 다를 뿐이다. 유럽의 경우는 경우마다 다르지만 국가보다는 지역적 차이가 큰 편이고, 동북아는 국가와 민족별로 매우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분명 민족에 혈통적인 요소는 존재한다. 대신 그것을 입증하더라도 과거 [[우생학]]과 [[파시즘]] 시대의 광기에 찬 선동과는 거리가 매우 클 뿐이다. 여기에 민족회의론을 주장하는 경우에는 '''광신적인 민족주의의 선동에서 나오는 극단적인 표어'''들을 일반적인 민족의 정의인 양 왜곡하기도 한다. 혈통은 민족을 정의하는 데에 쓰이는 요소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3대만 지나가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단지 '''정치적인 선동'''에서 매우 효과적이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나치의 [[홀로코스트]] 당시 자신이 [[유대인]] 혈통을 지녔음을 인지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나치는 유대인을 걸러내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서 심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조부모까지 심사'''고, 그 중에서 심사지 무조건적인 유대인 낙인이 아니었다. 이것은 비단 나치와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닌 상당히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는 민족의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혈통보다는 집단적인 정체성이고, 이는 문화와 언어 등의 요소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혈통이 민족의 구분에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혈통에 대한 비난을 한들, 당장 혈통을 그리 따지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있을까 보자. 부모의 혈통이 다르다면야 신경을 쓰기 쉽지만 그것이 조부, 조모 이상으로 올라가고 외형상이나 문화적이나 스스로의 인식이나 여타 사람들과 차이가 없으면 [[한국]]에서마저도 거의 무관심하다. 아니 당사자라도 4대조 이상의 혈통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즉 다시 강조하지만 '''혈통은 민족의 구분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집단적인 정체성'''이고, 그것이 국가 중심이면 Nation, 종족 중심이면 Ethnic Group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도 있지만, 그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고 그 추적도 용이하지 않다. 하지만 민족회의론에서는 혈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지배층의 교체에 관해서도 비판이 나오는데, 근대 민족주의의 시작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 중 영국에서 지배층은 외국인인 경우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것이 근대 민족의 생성과 민족주의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영국의 경우는 그 상황을 감안하여 독자적인 민족 담론을 만들어 나갔고, 문화적으로 피지배층과 달리 놀던 지배층들도 이에 맞춰 해당 시기에 [[영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발달시켜 나갔다. 위에서 설명한 nation의 문제로, 영국은 역사적인 경험으로 연합왕국의 구성국 전체와 외부에서 온 지배층, 이주민을 포괄하는 민족의 정의를 필요로 했다. 그로 인해 영미권의 nation의 정의에서 혈통의 영향은 더욱 낮게 나타난다. 설명하자면 복잡한 문제지만 영미권과 프랑스의 민족담론은 또 다르다. 또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한국의 [[의병]]이나 [[스페인]]의 [[게릴라]] 항쟁, 프로이센(독일)의 [[자유군단]] 등의 사건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당시에도 본질적으로 외세에 대한 거부감은 확고했고 외적들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지배계층의 선동이 있기는 했지만, 민중들의 민족의식이 약한 지역에서의 경우 오히려 그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19세기 중반 [[폴란드]]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반하는 봉기가 시도되자 폴란드 농민들이 그들을 잡아서 오스트리아 당국에 넘겨줬는데, [[동유럽]]은 당시에도 민족의식이 약한 지역이었다. 그중에서도 민족의식이 유달리 약한 [[벨라루스]]의 상황은 동양인에게는 이해 불가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유럽이나 동남아, 아프리카도 근대적 민족주의 도입이 이전의 원시적 민족의식이 보인다. 아프리카의 [[아샨티 제국]]만 해도 민족 말살이나 노예화로 악명 높은 제국이었다. 여기에 민족 반역자의 존재를 반례로 들기도 하는데, 당장 목숨과 이득이 걸린 일에 외세에 협조하는 행동은 당연한 것이다. 민족주의가 매우 강했던 20세기 전반기 유럽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수두룩하게 나타났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레지스탕스]]로 유명한 [[프랑스]]만 해도 레지스탕스 이상의 대독협력자가 발생했다. 또한 [[프랑스인]] 독일군 지원병은 수만명에 달했었다. 즉 민족의식의 반례로 들기에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걸 토대로 민족이라는 개념을 부정하려면 '배신자의 존재'를 넘어, '배신자'들에게 '배신이라는 의식이 없었음'까지 증명해야 한다. 또한 민족회의론자들이 민족이 없었다는 근거로 드는 지역들은 역사적으로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약했던 지역이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민족회의론을 외치는 [[임지현(역사학자)|임지현]]이 전공으로 한 [[동유럽]]이나[* 지역별로 달리 나타나나, [[벨라루스]]의 경우는 민족이든 뭐든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볼 수 있고, 대폴란드지역은 계층별로 다르지만 민족의식이 상당히 강했으며 [[우크라이나]]는 제국의 소속보다 [[https://en.wikipedia.org/wiki/J%C3%A1n_Koz%C3%A1k_(footballer,_born_1954)|코작]]으로, 갈리치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가 슐라흐타의 통치보다 낫다고 생각하였고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의 연합왕국의 영향으로 폴란드적 정체성과 리투아니아적 전통이 19세기에 충돌을 하고 있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9462|상상의 공동체]]를 쓴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84%A4%EB%94%95%ED%8A%B8_%EC%95%A4%EB%8D%94%EC%8A%A8|베네딕트 앤더슨]][* 베네딕트 앤더슨은 자신의 책에서 "이 책은 모종의 역사유물론과, 나중에 담론 분석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 모더니즘이 결합됐다."라고 쓰고 있다. [[https://marx21.or.kr/article/95|해당 인용구는 여기서 확인가능]] 민족주의를 해체하자는 논변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베네딕트 앤더슨을, 이념중립적인 연구자라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 두 정치 이념 모두 오늘날 매우 논쟁적인 위치인 입장이기 때문이며 앤더슨이 이를 의도하고 있음을 책에서 직접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각각의 이유로 반민족주의를 적극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삼으며 이들을 추종하는 경우 연구에도 그러한 입장이 녹아들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주로 연구한 [[동남아시아]]는[* [[태국]]이나 [[미얀마]]는 중앙정부에 각 제후들이 복속한 봉건왕국 수준이었고,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어를 쓰는 각 종족간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물론 그래도 태국인들이 캄보디아인들의 크메르 제국에 용병으로 쓰이다가 민족 감정으로 대항해 독립하기도 하고, 캄보디아인들 역시 다른 민족들과 경쟁에서 민족 감정을 이용하기도 하는 등 없다고는 볼 수 없다.] 동시기 타 지역과 비교해 유달리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약하게 나타난 곳이었다. 그런 지역을 중점으로 연구하고 여타 지역의 사건 일부와 결합시켜 민족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특히 이 지역을 [[서유럽]]이나 [[동아시아]]에 곧바로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말이다. 더 나아가면 민족에 대한 정의와 각 지역의 상황이 맞지 않기 때문에 민족이 상상일 뿐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민족에 대한 정의는 서구에서도 국가와 학파별로 다며, 이것은 각 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영미권과 프랑스에서는 그들의 전통에 맞춰 국가 중심에 시민권 및 계몽사상이 강하게 들어간 nation을, 독일에서는 수많은 국가들로 나뉘었던 자신들의 경험에 맞추어 종족을 중심으로 한 ethnic Group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물론 기준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당 정의가 서구의 상황에 맞더라도 거기에 맞춰 타 지역을 관찰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각 국가의 역사적 경험과 인문학이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유의하여서 관찰하고 담론을 이끌 필요가 있다. 한편 Nation과 Ethnic Group은 심지어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수백여 개의 폴리스로 분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를 구분하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인의 학살 및 노예화가 일어나자 큰 충격을 받기까지 하였다. 즉 Ethnic Group이 어느정도는 형성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대두된 것이 '''코스모폴리타니즘'''인데, 현재의 세계시민적인 의미와는 달리 독일 근대 민족주의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66156&cid=51609&categoryId=51609|이소크라테스]]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디오게네스]]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은 헬레니즘 이후 시기나, 근대 [[아나키즘]]과 더 연관이 깊다. 그러나 그 단어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에 이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판헬레니즘으로 분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은 폴리스 간의 다툼을 멈추고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원정으로 군사적인 허약함이 드러난 [[페르시아]]를 폴리스들이 뭉쳐서 공격하여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그리스인들의 새로운 영토로 개척하자는 사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 너무 대박을 쳤고, 이 원정이 반은 바르바로이로 보던 마케도니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헬레니즘]] 시대에 현재의 세계시민주의와 비슷한 의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로마 제국]]의 4두정치 때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본인을 '[[로마인]]'이 아닌 '[[다키아]]인'으로 여겼으며, 스스로가 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었다. 200년 전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속주로 삼은 일을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양 로마 시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도 모자라, 제국의 이름마저 '로마 제국'에서 '다키아 제국'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했을 정도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Galerius#Anti-Roman accusations|Galerius#Anti-Roman accusations]] 물론 그래도 근대적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편이기는 했다. 근대적 민족주의였으면 다키아인이 로마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08년 림노스(렘노스) 섬 출생의 미국 동로마 학자 피터 차라니스(Peter Charanis)의 증언에 따르면,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때 섬을 점령한 그리스 해군 병사들을 보러 나온 아이들은 그 병사들을 마치 자신들과는 별개의 족속을 부르는 것처럼 '그리스인(Hellenes)'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흡사 외국인을 대하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내심 황당해한 그리스 병사들은 아이들에게 "네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니?"라고 물었고, 이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 걸작이다. "네, 우린 로마인(Romans)이에요"[*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42.] 당장 당시에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때 그리스인들은 테베처럼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편을 바꾸어 가면서 싸웠다. 오히려 여러 민족이 공존한 페르시아 제국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민족주의적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Greco-Persian_Wars|#]] 한편 로마는 기원후 200여 년이 되면 가장 반항적이었던 [[유대인]]조차도 종족은 유대인이지만 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스인]]들은 아랍인들이나 투르크인들이 룸인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로마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각 종족집단은 로마 제국 말기 대 위기 때에 이민족의 침공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비록 실패하였으나 오랜 기간 로마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로마 제국이라는 Nation 하에 다양한 Ethnic Group이 산재하는 국가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19세기의 계몽주의-시민의식과 연결되는 민족주의와 일치한다고 볼 수 없으나, 민족이 근대적 산물인가,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반론이 된다고는 볼 수 있다. 근대의 민족은 시민의식 등이 들어간 [[국민]]으로써의 정의도 강하게 들어간다는 차이가 있으나, 이것도 각 국가들별로 정의가 다른 경우가 다반사다. 위의 나오는 Nation과 Ethnic Group의 차이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민족주의는 분명히 단점이 존재하고 그 때문에 일으키는 문제점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지나치게 나가서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까지 가는 것은 비약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그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