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주공화당(1963년) (문단 편집) == 창당과 정권내 분파, '''[[숙청]]''' == [[5.16 군사정변]] 이후인 1963년 전직 [[군인]] 및 일부 구 [[자유당]] 계열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창당되었다. 즉, 사실상 당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세력이 만든 당. [[대한국민당]] 세력, [[정구영]] 등의 학계 인사,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내내 민주공화당의 [[총재]]를 역임했다. 하지만 민주공화당과 박정희 개인의 관계는 결코 순탄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의회민주주의를 경시한 박정희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자주 있었으며, 민주공화당은 때때로 행정부에 반발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독재 성향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민주공화당과의 '정권 내 충돌'이 간간이 벌어지게 된다. [[1969년]]에 벌어진 [[4.8 항명]]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문서 참조. [[http://ko.wikipedia.org/wiki/%EB%AF%BC%EC%A3%BC%EA%B3%B5%ED%99%94%EB%8B%B9_(%EB%8C%80%ED%95%9C%EB%AF%BC%EA%B5%AD)#4_.C2.B7_8.ED.95.AD.EB.AA.85|#]][[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910246&ctg=1000|관련기사]] 4인방이라고 불리던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정치인)|김진만]], [[길재호]]의 "[[10.2 항명 파동]]"([[1971년]])도 있다. 4인방은 [[김종필]]의 득세를 막기 위해 키워졌으나, [[이원집정부제]]([[의원 내각제]] 요소 도입)를 구상하는 등 박정희 일인체제에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박정희는 [[오치성]] 내무장관을 발탁하여 기존 [[경찰]] 조직의 4인방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실미도]] 특수군 사건([[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사건]]. [[한진그룹|한진빌딩]] 노동자 난입사건. 기동경찰 총기 난사 사건 등으로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이 야당에 의해 표결에 부쳐졌고, 여기에 4인방이 동조하여 가결된 것이 바로 항명파동.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4인방을 [[영장]]없이 체포하고 모진 고문을 가해 반[[병신]]으로 만들었다. 박정희 일인체제 구축을 위한 [[3선 개헌]]과 [[10월 유신]]의 과정에서, 김종필[* 김종필 개인은 10월 유신 직전에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민주공화당과 김종필이 분리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김종필은 10.26. 이후 민주공화당 총재가 되었음에도 정국을 주도하지 못한 채 신군부에 당하고 만다.]은 물론 기존 주류 대다수가 숙청되었다. 게다가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의 '친위세력'인 [[유신정우회]]가 생겨나면서, 소외된 것이나 다름없는 공화당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존재로 몰락해갔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 전의 8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보다 지지율이 10%나 하락하였고, 1978년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1967년)|신민당]]보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국민의 지지와 독자적인 정당 조직력, 의회 정치 능력을 모두 잃어버린 셈. 한마디로 제4공화국 기간 동안 민주공화당의 존재는 있으나마나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