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주집중제 (문단 편집) == 시작 ==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제기되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체계화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혁명 투쟁보다 이익 투쟁하는 경향을 제기하여 대안으로 민주집중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늘 그랬듯(...)[*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비판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주의 사회 등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본인이 제시한 것들에 대해선 거의 설명하지 않았고, 그 부담은 후학들이 오로지 짊어졌다.] 의회민주주의와는 다른 [[직접민주주의]]에 의거한 방식이라는 걸 제외하면 민주집중제가 뭔지 정확히 제시하지는 않았고, 이에 후학들이 민주집중제가 뭔지 대신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레닌은 조직론으로 ‘중앙집중제’를 당 조직 운영원리로 제시하여 [[소련]]과 [[소련 공산당]]의 기초로 삼았다. 레닌은 [[서유럽]] 방식의 [[투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투표를 행사하고 난 뒤에는 [[인민]]들이 다시 [[노예]]로 회귀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마르크스와 레닌이 살던 시대에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제한적이었고, 여성은 투표권을 부여받지조차 못했다.] 서유럽의 투표라고 하는 것은 형식적 [[권리]]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선 민주집중제로 가야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독재]]로 발전할 가능성을 염려하여 중앙집중제([[복종]])에 민주(시민의 [[토론]]과 합의)를 더하여 ‘민주집중론’으로 정립한다. 투표 이후 정치권력에 의한 하향식 의견수렴방식이 아니라 인민대중으로부터 의견을 모아서 당원에게로 그리고 당 [[간부]]에게로 의견을 수렴하는 상향식 의사결정방법이 진정한 민주성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는 일단 [[제2차 세계 대전]] 전이었으므로 집단주의나 [[전체주의]]의 폐해가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개개인의 [[이성(철학)|이성]]이 집단 단위로 모이고 그 길을 정치적 엘리트인 당 [[관료]]와 혁명 [[전위대|전위]]가 이끌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이 때는 아직 [[파시즘]]이 대두하기도 전이었고,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왕정]]으로 유지되던 시대였다. 이때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등의 세력들은 "왕의 폭정을 혁파하고 평등한 [[민주공화정]]으로 가자!"라는 모토 하에 함께 움직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민중]]이 [[권력]]을 아직 쥐어보지도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리고 왕정이 아닌 당/[[공화국]]이 권력을 쥐어보지도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미국]] 등 일부 국가 제외)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 살아있던 시기였다. 이 당시 민주집중제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공산당|혁명적 당]]의 최고지도기관은 '''상향선거로 구성원이 정해진다.''' >2. 보고의무제 원칙에 따라 혁명적 당의 하부 기관은 상부 기관에게 [[국가]]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3.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4. 하부 기관은 상부 기관에 복종한다. >5. 다수 인민의 뜻에 맞는 최고지도기관을 선출하기 위해 모든 [[인민]]은 [[선거]]·[[투표]]에 참여할 책임이 있다. >6. 지방 사무는 [[인민]]의 자치체가 자발적으로 관리할 의무가 있다. >7. 모든 지방의 '''인민 자치체는 중앙 기관을 [[비판]]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 할 권리가 있다.''' >8. 모든 지방 및 중앙 위원회 구성원들은 '''[[프롤레타리아|노동 계급]]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