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역사 (문단 편집) == 폴란드의 지배 (1526 ~ 1795)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arsaw 1656.png|width=100%]]}}}|| || ↑ 1656년 바르샤바의 스카이라인을 묘사한 판화 || 1529년, 바르샤바는 폴란드 귀족의회인 세임의 의석이 되었고 16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폴란드에 편입된 마조프셰가 크게 발전해 바르샤바 역시 인구 2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바르샤바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연방이 형성되기 전까지 두 국가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와 [[빌뉴스]]의 중간에 있었고, [[발트해]]의 항구도시 [[그단스크]]와도 다른 두 도시들보다 가까웠다. 그리고 당시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 바사]][* [[스웨덴]] [[바사 왕조]] 출신이었던 그는 1587년,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 공주가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던 혈연에 힘입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는 1592년, [[스웨덴]] 왕위도 자연스럽게 계승하여 스웨덴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동군연합]]으로 묶었는데 스웨덴 섭정이었던 숙부 [[칼 9세|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그의 스웨덴 왕위를 자꾸 위태롭게 하고 있었기에 이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어야 했지만 당시 수도로서 그가 머물던 크라쿠프는 남쪽으로 좀 많이 떨어져 있었다. 마침 1595년, 왕궁이었던 크라쿠프 바벨 성에 불이 나자, 지그문트 3세는 1596년에 바르샤바로 왕궁을 옮겼다.[* 결국 1597년, 칼 공작은 반란을 일으켜 지그문트 3세를 [[린셰핑]] 근처에서 패퇴시켰고, 1599년에 조카를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시켜 자신이 5년 동안 섭정으로 있다가 1604년,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1632년에 사망할 때까지 스웨덴 왕위를 되찾는데 초점을 두었는데, 그의 이런 정책은 100년이 넘는 연방과 스웨덴의 대립의 시작이었다.] 이에 맞추어 왕실 건축가였던 산타 구치(Santa Gucci)가 왕궁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했고, 1611년에 공사의 주요 부분이 마무리되자 이때부터 이곳은 왕들의 거처가 되었다.[* 공사는 1619년에 완전히 끝났다. 이 왕궁은 현재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입구를 잠코비 광장과 함께 장식하는 건축물로 바르샤바 최고의 랜드마크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두어 번 크게 파괴되었지만(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엔 기둥 하나, 벽 한장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때를 원형으로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다. 잠코비 광장 중앙에는 큰 기둥이 있는데, 기둥 위에서 십자가를 들고 바르샤바를 내려다보는 인물은 지그문트 3세이다.] 또한 주요 정부기관도 바르샤바로 이전했다. 폴란드 분할 때까지 공식적인 수도는 크라쿠프였고 왕의 대관 같은 왕사와 관련된 의식들은 여전히 크라쿠프에서 치러졌지만 바르샤바는 1596년부터 실질적인 연방의 수도로서 기능했고 대외적으로도 연방의 수도는 바르샤바로 인식되었다.[* 다만 바르샤바가 완전히 공식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가 된 건 거의 멸망 직전인 1793년에 가서야였다.] 이 무렵 새로운 도시 확장은 사적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지역들은 귀족과 지주들이 통치권을 행사했는데, 바르샤바 내의 프라가[* 현재 바르샤바 중심부에서 강 건너편 북부의 구역. 대략 [[스타디온 나로도비|바르샤바 국립경기장]] 옆동네다.]라는 구역은 1648년 따로 도시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귀족들의 힘이 강했던 당시 연방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성장하던 도시는 '[[대홍수(역사)|대홍수]]'를 거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연방을 침공한 각국의 군대에 의해 1655년~1658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스웨덴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군,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군]]에게 3차례나 빼앗기고 다시 탈환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문화재들을 약탈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약탈 후 도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도시는 전쟁 전보다 더욱 화려해졌다. 고딕 양식이 첨가된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이 거리를 메웠고 뒤이어 귀족과 부자들에 의해 거대한 바로크 양식 건물들이 도시 곳곳에서 올라왔다. 1677년에는 폴란드 민족의 '군신' [[얀 3세 소비에스키]]가 바르샤바 교외에 바로크 양식의 [[빌라누프 궁전]]을 짓기도 했다. 연방의 국운은 천천히 쇠하기 시작했지만 도시는 좀 더 번영하고 화려해져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elloto warsaw.jpg|width=100%]]}}} || || ↑ 궁정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가 그린 18세기 말 바르샤바의 신세계 거리(Nowy Świat) || 18세기 바르샤바는 수차례 함락되고 재탈환되는 전장이 되었다. 1697년에 선출된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출신 [[아우구스트 2세]]는 1700년 무모하게 [[루스 차르국]]과 함께 [[대북방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연방군은 [[스웨덴군]]에 크게 밀렸고 1702년 바르샤바는 스웨덴의 수중에 떨어졌다.[* 애초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였던 아우구스트 2세는 폴란드보다 모국인 [[작센 선제후국]]에 더 관심을 두었다. 때문에 연방에서 왕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폴란드 귀족들은 자국이 어떤 지경에 처해있는지도 모르고 왕에게 특권을 요구해댔다. 폴란드 귀족들의 환심을 사고자 아우구스트 2세는 1629년에 스웨덴에게 상실한 [[리보니아]]를 되찾기 위하여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 [[덴마크-노르웨이 왕국|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4세]]와 동맹을 맺고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쟁 초반부터 덴마크가 이탈하고, 루스 차르국도 [[에스토니아]] [[나르바]]에서 스웨덴군에게 대패하면서 스웨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형세로 흘러갔다. 아무리 국력이 쇠해도 여전히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하던 연방이었지만 연방의 군사권을 상당부분 장악하던 귀족들이 말을 듣지 않아 전쟁 중에 힘을 제대로 쏟을 수 없었고, 결국 뛰어난 지휘관인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게 유린당하고 말았다.] 바르샤바를 점령한 [[칼 12세]]는 폴란드 귀족들을 움직여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하고 꼭두각시 왕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새로운 연방의 왕으로 삼겠다고 했다.[* 1709년 스웨덴군이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루스 차르국군]]에게 대패하고 칼 12세마저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자, 더 이상 칼 12세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스타니스와프 1세의 왕위도 끝났다.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자 세임에 의해 다시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러시아 제국]]은 아우구스트 2세의 유일한 적자 [[아우구스트 3세]]를 내세워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1704년, 작센군을 데려온 아우구스트 2세는 대규모 포격 끝에 바르샤바를 재탈환했지만, 1705년 전투에서 또다시 크게 져 바르샤바를 도로 빼앗겼다. 1707년에는 러시아군이 스웨덴으로부터 도시를 빼앗아 2달간 점령하다 다시 빼앗기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바르샤바는 스웨덴에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1709년 이후 전쟁의 균형추가 러시아 제국으로 기울자, 연방을 스웨덴으로부터 사실상 해방한 러시아 제국은 연방에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바르샤바엔 1713년부터 러시아와 작센의 군대가 상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쟁에 의한 피해 외에도, 1708년엔 페스트가 도시를 덮쳤고 1713년엔 홍수와 함께 흉작이 발생해 도시에 큰 타격을 입혔다.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한 후 일어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때에도 바르샤바는 전장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와중에도 바르샤바의 18세기는 특출나게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작센에서 온 아우구스트 2세[* 아들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관심도 없었고, 바르샤바는 어쩌다 한 번 방문했으며 인생 대부분을 드레스덴에서 보냈다.]는 작센, 그리고 [[독일]] 각지에서 건축가들을 불러와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원형으로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1740년에는 [[가톨릭]] 성직자에 의해 귀족 자제를 입학 대상으로 하는, 바르샤바 대학의 전신인 '콜레기움 노빌리움(Collegium Nobilium)'이 건립되었으며 1747년엔 폴란드 최초, 최대이자 당대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도서관 중 하나이던 자우스키 [[도서관]](Załuski Library)[* 당대 유럽에는 공공도서관이 몇 없었고, 따라서 자우스키 도서관은 유럽에서 가장 빨리 세워진 공공도서관이기도 했다. 설립 당시 약 20만 권의 저작을 소장했으며, 곧 40만 장을 소장하는 도서관으로 성장했다.]이 세워졌다. 1742년에는 도시의 도로와 하수를 관리하는 도시 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도시에는 초기 자본주의가 확산되었다. 공장이 들어서고 귀족과는 다른 자본가와 기업가들이 성장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농민들이 바르샤바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 들었으며 도시는 급격히 성장했다. 1754년 고작 24000에 불과했던 인구가 40년도 지나지 않은 1792년에 11만 5천명으로 불어 바르샤바는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8세기 동안 바르샤바는 그단스크를 넘어 연방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한편 연방의 쇠퇴는 가속화되어 1772년 [[폴란드 분할]]이라는 끔찍한 상황을 겪게 되었고, 1788년에 [[예카테리나 2세]]의 허락을 얻어[* 1709년 스웨덴으로부터 연방을 해방시켜준 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러시아가 후원하던 [[아우구스트 3세]]가 결국 연방의 왕이 된 점, 1764년 친 러시아 성향의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왕으로 선출된 점 등으로 말미암아 연방은 사실상 러시아 제국의 종속국이 된 상황이었다.] 연방의 정치적 위기 해소와 외세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세임이 바르샤바에서 소집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폴란드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이 반항적인 회의를 승인했다.] 이 회의로부터 약 32개월의 노력 끝에 세임은 '1791년 5월 3일 [[헌법]]'을 이곳에서 반포했다.[* 1787 미국 독립헌법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반포된 성문헌법이다. '황금의 자유'라는 무제한적인 특권을 가진 귀족들에 의해 무정부에 가까운 상황이 종종 발생하던 당시 연방의 정치체제를 훨씬 민주적인 [[입헌군주제]] 형태로 바꾸는 헌법으로, [[선거군주제]]를 세습 군주제로 바꾸고 양원제 의회, 선출직 판사를 두어 기초적인 삼권분립을 보장했다. 그리고 귀족과 도시민의 지위를 동등화하고 귀족 아래에서 농노에 가깝게 지내던 지방 농민들을 법의 보호하에 두어 농노제의 폐단을 완화했으며, 귀족들에 의해 마구 남용되어 끊임없이 국가 발전을 저해했던 '[[리베룸 베토]](Liberum Veto)[* 무제한적인 자유 거부권]'를 폐지해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또한 참정권을 재조정해 과거에 귀족이면 무조건 [[참정권]]이 부여되던 것과는 달리, 땅이 있거나 국가에 세금을 내는 모든 사람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총 70만의 귀족 중 땅이 없고 가난한 30만 귀족의 참정권이 박탈당했으며, 땅을 가진 군역 종사자들, 자본가나 자영농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이는 헌법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만 간략히 서술한 것으로 이 밖에도 조항이 더 많이 있다. 현대의 헌법에 비하면 그 조항 수도 적고 선진적인 면이 덜한 구석도 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획기적인 면이 많았다. 1795년 이후 국가가 사라진 123년 동안 폴란드인들은 이 헌법을 성공적인 내부 개혁의 증거이자 폴란드 주권 회복을 보장할 상징으로 여겼다. 현재 폴란드는 이 헌법을 매우 자랑스러워 해 매년 5월 3일을 제헌절로서 기념한다. 이 이상 서술하면 주석이 너무 길어지기에 이 헌법에 대해서는 따로 항목을 만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 유럽에 혁명의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계몽주의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이 헌법을 연방의 주변 국가들은 큰 위협으로 여겼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끝낸 예카테리나 2세는 1792년에 연방을 전격 침공하여 패배시킨 후 헌법을 정지시켜버린다(헌법수호전쟁). 1793년의 2차 폴란드 분할 뒤, 파멸을 눈앞에 둔 연방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1794년 연방 전역에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가하여 준장까지 승진한 바 있다. 귀국한 뒤 조국의 상황에 통탄을 금치 못해 봉기를 이끌었고 결국 실패하여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에 붙잡혔다. 그의 시신은 현재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안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폴란드 최고의 민족영웅 중 하나로 폴란드에선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을 많이 볼 수 있다.]가 이끄는 봉기군이 발흥해 외세를 물리치려 했다. 코시치우슈코의 군대가 각지에서 성공을 거두자 이에 맞추어 4월 바르샤바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는데, 무기고를 장악한 시민들은 2000명이 넘는 러시아군을 전사시키고 잔존병력을 철수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치에요비체 전투(Battle of Maciejowice)에서 봉기군이 패배하고 코시치우슈코가 사로잡히자, 사기가 떨어진 바르샤바의 민병대들은 도시를 모두 요새화하는데 실패했고 11월에 결국 러시아군에게 도시가 함락되고 만다. 러시아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후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러시아 원정]]을 막는 데 큰 공헌을 한다.]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광범위한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했다. 4월 봉기에서 죽은 러시아군에 대한 복수로 특히 프라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는데, 이때 바르샤바 전체에서 살해된 사람의 숫자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지만 최대 2만에 달한다고 한다. 이 봉기에 놀란 주변 3국은 1795년 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연방을 완전히 없애버렸고, 바르샤바는 [[프로이센 왕국]]에 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