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역사 (문단 편집) == 외세의 지배 (1795 ~ 1918)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uw.jpg|width=100%]]}}}|| || ↑ 11월 봉기 당시 바르샤바의 무기고를 탈환하는 폴란드 봉기군. || 프로이센에 귀속된 후 바르샤바는 남프로이센의 주도가 되었다. 얼마 뒤 1806년 프로이센군을 쳐부수고 이곳에 당도한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에 의해 이 도시와 폴란드 중부지방을 묶어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 나폴레옹의 동맹 중 하나인 작센 왕국과 [[동군연합]]으로 묶였다. 당시 작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바르샤바 공작을 겸했다. 자세한 사항은 [[바르샤바 공국]] 항목 참조.]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바르샤바 공국의 영역은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대체되었고, 같은 회의에 의거해 이 나라가 [[러시아 제국]]과 [[동군연합]]으로 묶이면서 바르샤바는 사실상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 나라는 한때나마 진보적이었던 [[알렉산드르 1세]]의 승인 아래 자체적인 헌법을 가지고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고 바르샤바 역시 자치를 누리며 많이 성장했다. 1816년에는 [[바르샤바 대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 사후 1825년 반동적인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여 자주 폴란드 입헌왕국의 헌법을 무시하며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입헌왕국에 총독으로 파견된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파벨 1세]]의 둘째 아들로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 니콜라이 1세의 형이다. 알렉산드르 1세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차후 황위 계승 서열 1순위였으나 본인이 황위 계승에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 후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 잠시 황제 자리를 맡았두었다가 3주 후 니콜라이에게 양위한다. 이를 빌미로 개혁적 성향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이런 니콜라이 1세의 뜻대로 폴란드의 헌법을 무시했고 폴란드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했으며, 행정 요직에서 폴란드인을 쫓아내고 러시아인을 대신 채워 넣었다. 분노한 입헌왕국의 젊은 장교들은 1830년 11월 대공의 거처인 바르샤바의 벨베데르 궁을 습격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지만(11월 봉기)[* 바르샤바에서의 봉기가 성공하자, 봉기는 왕국 전역에 배치된 폴란드 군대로 확대되었고 러시아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입헌왕국과 사실상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에 훨씬 큰 피해를 강요하며 열심히 싸웠지만 러시아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폴란드군 사상자 4만, 러시아군 사상자 7만을 남긴 채 폴란드군의 패배로 봉기는 끝났다.] 325일에 이르는 봉기 끝에 결국 패하고 말았다. 패배의 대가는 가혹했다. 니콜라이 1세는 왕국과 바르샤바의 자치권을 대폭 축소하고 왕국의 군대는 해산했다. 의회는 정지되었으며 대학교는 문을 닫았다. 또 바르샤바에 군정을 세우고 도시에 북쪽에 요새를 짓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1861.png|width=100%]]}}} || || ↑ 1861년 계엄령이 내려진 바르샤바에 주둔한 러시아군. || 약 3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바르샤바 시민들은 이 억압을 참아왔다. 러시아 제국이 [[크림 전쟁]]에서 패배하고 [[알렉산드르 2세]]의 치하에서 개혁의 고삐를 당기던 1860년, 러시아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해진 바르샤바에는 새로운 도서관과 예술가 커뮤니티가 생겼다. 1862년에는 순수미술 박물관이 들어서고,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신문 하-츠피라(Ha-Tsfira)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러시아의 검열을 받아 단 6개월만에 폐간한다. 이후 1874년부터 다시 발간했다.] 바르샤바 대학도 이 시기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지하에선 독립의 움직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1861년 4월에는 바르샤바 시내에서 반 러시아 시위가 격화되어 200명이 사망하는 대형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잇따르는 바람에 1861년 내내 러시아군은 계엄령을 내리고 바르샤바 거리 한가운데에 텐트와 진지를 꾸리고 고생해야 했다.[* 같은 해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뉴스]]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빈발했다. 리투아니아는 1월 봉기 당시 폴란드와 함께 전역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각지의 지하조직들이 모여 폴란드 국민정부를 형성하고 구 연방의 영토 회복을 기치로 1월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지하조직들이 완전히 조직화되지 못했고 러시아 적대국들의 지원도 받지 못했기에 봉기는 11월 봉기처럼 전면전의 형태가 아닌 게릴라전, 러시아 인사들에 대한 암살 등으로 진행되었다. 1년하고도 4개월에 걸친 봉기 끝에 게릴라군은 각개격파당하고 진압되었다. 봉기군 396명이 처형당하고 18,672명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것을 포함해 7만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캅카스]],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 각지의 불모지로 보내졌다. 봉기는 표면상 별 소득 없이 끝났지만 점차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하고 1861년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로 관심이 돌아가 있던 폴란드인들의 민족주의를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인들의 관심을 다시 돌리고 여전히 강하던 폴란드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1864년 폴란드의 농노제도 폐지했다). 다만, 이런 민족주의의 고취와 별개로 독립운동 자체는 무장투쟁이 아닌 실력양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봉기 기간 내내 바르샤바 내에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러시아군은 때론 보복으로 주요 건물들을 폭파시키기도 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거듭된 초대형 반란에 지친 러시아는 유화책을 완전히 버리고 1867년 명목상 존재하던 폴란드 입헌왕국을 러시아의 [[프리비슬린스키]](Привислинский край, 러시아령 폴란드)로 자국 영토에 편입해버린다. 이때부터 약 50년간 바르샤바는 완전히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19th.jpg|width=100%]]}}}|| 19세기 중반 이후, 바르샤바는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산업혁명]]기에 발맞추어 물적으론 크게 성장했다. 1840~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빈(오스트리아)|빈]], [[비드고슈치]]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경제체제가 근대적 자본주의로 발전함에 따라 19세기 말엽~20세기 초입에는 450개의 공장에서 30,00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여, 한창 성장하던 다른 도시 [[우치(폴란드)|우치]](Łodz)[* 같은 시기 면직 산업이 발달하고 있던 우치는 종종 '폴란드의 [[맨체스터]]'라고 불렸다.]와 함께 러시아령 폴란드의 공업중심지로 성장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출생의 소크라티스 스타린키에비츠(Sokrates Starynkiewicz)가 시장으로 재직할 때(1875~1892) 바르샤바는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으며 이 시기 바르샤바 최초로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졌다. 해방된 농노들은 끊임없이 도시를 찾아와 1830년 14만명이었던 인구는 1900년 686,000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번영의 이면에는 강압적인 러시아화가 존재했다. 러시아 총독부는 [[폴란드어]] 학교를 폐쇄하고 [[정교회]] 성당을 더 많이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어]]로 하는 교육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882년 센서스에 의하면 바르샤바는 문맹의 도시나 다름없었데, 전체 인구의 46.1%만이 초등교육을 받았고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6.1%,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1.9%에 불과했다.[[https://pl.wikipedia.org/wiki/Historia_Warszawy|#]] 바르샤바에 가득했던 불안은 이런 러시아화에 대한 반발에 상당 부분 기인했다. 결국 1월 봉기 이후 큰 시위 없이 잠잠하던 바르샤바에선 1905년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진 것을 계기로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와 파업이 1907년까지 이어졌고 러시아 경찰과 카자크 기병대가 이를 진압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독일 제국|독일]]에 크게 밀리면서 1915년 8월 6일 바르샤바는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다. [[독일 제국군|독일군]]은 전쟁에서 폴란드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유화책을 썼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에선 폴란드어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기술대학, 경제대학 등 각종 학교가 들어섰다.[* 반면 당시 미처 러시아 제국 본토로 도망치지 못한 [[러시아인|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인|벨라루스계]] 이주민들과 조상 대에 완전히 정교회로 개종하여 태생이 정교회 신자인 일부 토착 폴란드인들은 독일군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또한 이 시기 독일 군정[* 독일은 점령한 러시아령 폴란드에 자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괴뢰국]]인 [[폴란드 섭정왕국]]을 세웠다.]은 바르샤바의 외곽 지역을 시의 영역으로 통합해 바르샤바는 행정구역 상 면적이 3배로 커지게 되었다. 1918년 가을 독일에서 혁명이 터지자 11월 8일 독일군은 철수했고, 드디어 외세가 사라진 바르샤바에선 독립준비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1월 10일 폴란드 군단의 지휘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러시아 지배 하 리투아니아 출생으로, 폴란드 독립의 영웅이다. 1904년 독립군인 폴란드 사회당 전투단(후에 폴란드 군단으로 개편)을 설립해 끊임없이 러시아군을 괴롭혀 왔다. 러시아 제국의 약화를 바라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묵인 하에 피우스트스키는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세를 불렸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한 그는 그의 '폴란드 군단'을 이끌고 독일-오스트리아 연합 측에 서서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가 바르샤바에 도착해 러시아와 독일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다음날 섭정의회가 설립되어 그에게 군정권을 부여하며 폴란드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바르샤바를 독립 폴란드의 수도로 지정했다.[* 1937년 폴란드 제 2공화국은 1918년 11월 11일을 폴란드의 독립 기념일로 지정했고, 지금도 폴란드는 이 날을 국경일로서 기념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