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에른 (문단 편집) === 북부 지방(구 [[프로이센]])에 대한 [[지역감정]] === 과거부터 대대로 바이에른은 프로이센(현재 [[브란덴부르크]])에 라이벌 의식과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그 후신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베를린]],[* 현재 독일에 남아 있는 프로이센 지역 중 바이에른과 경제 및 인구 규모로 대항할 만한 곳들이다.] 거기에다 [[한자동맹]] 자유시인 [[함부르크]]와 [[브레멘]]에까지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축구 경기에서도 [[바이에른 뮌헨]]-[[베르더 브레멘]] 경기와 바이에른 뮌헨-[[함부르크 SV]] 경기에서 강한 라이벌 의식이 드러난다. ~~하지만 현실은 브레멘과 함부르크가 불쌍할 정도로 처절하게 털린다.~~ 바이에른은 본래 프로이센과 동등한 [[왕국]]이었으나, 187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저히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고, 바이에른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통일 이전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큰 연방국 중 하나였으며, 통일된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다. 그러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 주도 하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새 [[독일 제국]]에서의 주도권은 프로이센, [[함부르크]]와 [[브레멘]] 등 구 [[북독일 연방]] 세력, 거기서도 특히 인구, 면적과 경제 규모가 우월한 프로이센이 잡게 되었다. 새 [[독일 제국]]의 황제, 수상, 국기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제도들이 프로이센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참 오묘하게도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던 바이에른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각을 세웠지만[*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으며, 보오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 측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그리 홀대를 받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술했듯이 독일 지역권 내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단일 세력이었기 때문에 프로이센 측도 적대시하는 쪽보다는 포섭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 당장 오스트리아 편을 든 북독일 연방국 중 하노버 왕국, 나사우 공국, 헤센 선제후국은 아예 망했고, 헤센 대공국과 작센 왕국도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사실 이 두 나라도 프로이센이 완전히 병합하려 했으나 러시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선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특히 헤센은 강제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당한 북부 오버헤센을 사실상 프로이센한테 뺏겼다.] 이렇게 줄 잘못 섰다가 풍비박산난 다른 왕/공국들과는 반대로 프로이센 측에서는 하노버를 멸망시키고 털어먹은 금고의 금괴를 전부 바이에른 왕국에 뇌물로 넘기면서 통합을 제안했고, 1871년 바이에른 왕국도 독일 제국에 제후국으로 가맹하게 된다. 그리고 이 뇌물로 받은 금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건축 덕질로 탕진한다. 역사적으로 바이에른 사람들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을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보다 유서깊다고 여겨서[* 실제로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될 무렵, 호엔촐레른 가문은 [[뉘른베르크]]에서 황제 거성이나 관리하고 있었던 소규모 귀족 가문이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호엔촐레른 가문 이전에 [[브란덴부르크]]를 통치하기도 했고, 프로이센의 실질적인 본체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호엔촐레른 가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1415년 이후의 일이다.] 바이에른 사람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한자동맹]] 자유시가 [[개신교]]인 반면 바이에른은 [[가톨릭]] 국가였고, [[독일 제국]]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이 전국을 개신교 지역으로 만들려는 작업에 착수하며 가톨릭 지역을 압박한 것도 그 반감에 더 불을 지피기는 했지만.[* 다만 이 사안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딱히 바이에른만 압박한 것은 아니어서,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가톨릭이 무시못할 지분을 차지하던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오버슐레지엔, [[서프로이센|베스트프로이센]], [[포젠]] 등의 가톨릭 세력도 처지가 별다를 바 없기는 했다.]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프로이센이 멋대로 일으킨 전쟁에 바이에른이 이끌려갔다."라고 여길 정도였으며, 이는 프로이센의 중심지 [[베를린]]에서 유지되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이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중도 좌파 성향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지자, 바이에른은 강경 [[우익]]을 지원하여 [[나치]]의 발상지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내륙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전부 옛 [[프로이센 왕국]] 지역이다.] 등이나 [[함부르크]]보다도 연합국의 폭격을 덜 맞아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타 지역보다 덜했다. 전후 복구 역시 전쟁 피해를 직접적으로 본 [[영국]]이 점령한 [[니더작센]]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소련]]이 점령한-그리고 반은 [[동독]]이 가져가고 반은 동독에 포위되어 고립된-[[베를린]], 아예 소련이 전부 점령하고 [[폴란드]]에 절반이 털려나간 데다 공산화까지 되어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던 [[브란덴부르크]]보다는 '''[[쇼 미 더 머니]]를 쳐가며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도 여력이 충분한''' [[미국]]이 점령한 바이에른 쪽이 훨씬 수월하고 빨랐다. 여기에 더해 베를린에서는 [[지멘스]]와 알리안츠의 본사가 바이에른으로 이전되고, [[작센]]에서는 [[아우디]] 본사가 이전되며 바이에른은 [[어부지리]]를 누렸다. 유명한 것들만 추린 게 이 정도고 언급 안 된 기업들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 결국 프로이센은 양차 대전 이후 완전히 폴란드와 러시아 땅으로 찢겨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해안이 없는 내륙 지대에 농경지 밖에 없어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바이에른은 독일의 영토로 끝까지 살아남아 폴란드와 러시아에게 합병당한 구 프로이센 지방과 대전 말기 베를린 공방전으로 초토화된 수도 베를린 등지에서 나온 실향민과 피란민들이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덜했던 바이에른 지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지역 인구도 늘어나고,[* 다만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포메른 등 구 프로이센 지역 영토들에서 빠져나온 구 프로이센 지역의 실향민들은 전쟁 당시 독일이 영유권을 상실한 구 프로이센 지역과 다른 지역 정서와 문화, 자연환경 때문에 바이에른 주에서 정착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전후의 여러 혜택들을 골수까지 빨아먹으며 오늘날 독일에서 전쟁으로 잃은 구 프로이센 지역들보다 부유한 지방이 된 걸 감안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한편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바이에른과 대비되는 북부 지역 '대표' 이미지를 [[니더작센]]이 갖게 되었는데(산악 내륙 지역과 대비되는 평지와 바닷가, [[가톨릭]]과 대비되는 [[개신교]] 이미지 등) 실제로도 [[폭스바겐]]의 본사가 [[하노버]] 근교인 [[볼프스부르크]]에 자리잡고 있다. 즉 동서독 분단 이후의 남북 지역감정 구도는 바이에른 대 니더작센 이미지로 재편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사투리 역시 바이에른 사투리와 ~~[[먼나라 이웃나라|머나먼 동방에서까지]] 지역드립으로 유명해진~~[* 실제로 동서독 통일 이전 오씨(Ossi)란 단어는 본래 동프리슬란트 사람들을 뜻하던 단어였다.] 동프리슬란트 사투리[* [[저지독일어]]의 한 갈래이다.]가 자주 비교당하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