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충시 (문단 편집) === [[국민혁명]] === ||[[파일:이장백.jpg]]|| || 1938년의 리쭝런, 장제스, 바이충시. ||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당정대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였다. 신계계의 7군도 이에 호응, 북벌에 참여하였고 바이충시는 북벌군 총참모차장에 임명, 호남, 호북의 [[우페이푸]] 부대, 강서성의 [[쑨촨팡]] 부대를 격파한 후 절강으로의 진격을 준비했다. 1927년 1월 1일 [[난창 군무선후회의]]에 참석했던 바이충시는 [[허잉친]]의 동로군 전적총지휘관에 임명, 장제스의 직계군을 지휘하여 상하이, 난징으로 진격했다. 2월 18일 항저우를 점령한 바이충시는 상하이 남부 방어선을 돌파, 3월 19일 오송, 3월 21일 상하이 외곽의 용화를 점령하여 3월 22일에 [[저우언라이]]가 주도한 폭동으로 무방비 상태에 가까웠던 상하이에 입성했고 3월 25일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때 장제스와 [[중국 공산당]]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바이충시는 장제스와 의논하여 난징과 상하이의 공인규찰대와 총공회 해산을 의논, 3일이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후 바이충시는 상하이 계엄사령관에 취임,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청방과 협력하여 규찰대를 해산하고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이때 서방언론은 바이충시를 공산당원 참수꾼이라고 불렀으며 [[저우언라이]]도 바이충시에게 잡혀서 참수당할 뻔 했으나 불분명한 과정을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체포되었다는 것까지는 기록이 일치하지만 어떻게 탈출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4.12 상하이 쿠데타]], [[저우언라이/생애]] 문서 참조.] 이후 바이충시는 장제스와 함께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7월에 이르러 [[국공결렬]]로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가 공산당과 결렬하면서 난징 측이 가지고 있던 반공 명분의 우월성이 퇴색되자 난징 국민정부 내부에서 장제스의 지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8월 8일 영한합작을 촉구하던 난징 국민정부의 연명 전문에서 리쭝런이 첫번째로, 바이충시가 두번째로 서명했고 장제스는 4번째로 서명했다.] 8월에 [[쑨촨팡]]이 산동에서 반격하여 쉬저우를 점령하고 [[탕성즈]], [[장파쿠이]] 등 우한 측의 공격이 시작되자 바이충시와 리쭝런은 우한을 공격하라는 장제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장제스에게 하야를 종용했다. 결국 장제스는 8월 12일 하야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8월 30일에 쑨촨팡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 이후 우한과 협상, 9월에 [[영한합작]]을 이루어냈다. 이어 새로이 성립된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참가를 거부하던 [[탕성즈]]의 군세를 [[당계전쟁]]을 통해 섬멸하면서 양호 지역을 장악, 탕성즈 휘하의 많은 부대를 흡수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허나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쑹씨 일가와 정치적인 동맹을 이루었고 [[후한민]]을 비롯한 우익 당권파와 광동파,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1928년 1월에 복직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바이충시는 1월 7일 장제스 복직에 대해 축하전문을 발표한 리쭝런과 달리 1월 9일 [[장황사변]]과 [[광저우 폭동]]의 주모자 및 연루자 처벌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복직을 비난하는 등 광서파에서 장제스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나 장제스가 휘하 장령들을 포섭하고 리쭝런이 지나친 강경론에 동조하지 않아 곧 장제스의 복귀에 순응했다. 1928년 4월 펑위샹, 옌시산까지도 합세한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 바이충시는 다시 활약하여 장쭝창의 군대를 박살내고 베이징까지 진격했으며 제4 집단군 전적 총지휘, 4집단군 부사령관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동북군벌의 [[양위팅]]과 협력하여 산동성에서 [[장쭝창]], 저옥박의 직로연군을 토벌했으며 이후 장쭤린의 사망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전문을 보내는 등 [[동북역치]]에도 나름 기여를 했다.[* [[계계군벌]] 자체가 [[봉천군벌]]과 큰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관대한 입장을 취했지만 바이충시 본인은 그 중에서도 [[봉천군벌]]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장제스의 주장에 따르면, [[양위팅]]과 접촉하여 장쉐량 제거를 기도하기도 했다.] 북벌 완성 이후 평진 지역에 주둔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