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충시 (문단 편집) === [[반장전쟁]] === 1929년 [[편견회의]]가 개최되면서 수백만에 달하는 군대에 대한 감축이 시작되었으며 각 지방의 정치분회가 모두 폐지되기로 결의했다. 이때 바이충시는 정치위원 겸 편견위원, 제4 편견구 판사처 주임에 임명되어 편견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국민혁명]] 시기의 군비 배분 문제, [[장황사변]]의 처리를 놓고 장제스와 악감정을 주고받은 광서파는 장제스의 중앙집권화에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1929년 2월, 바이충시의 맹우인 군사참의원장 겸 우한 정치분회 주석 [[리쭝런]]이 1929년 2월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파면하고 35군장 [[허젠]]을 신임 주석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을 일으켜 중앙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바이충시는 처음에 이를 두고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지만 곧 반장으로 돌아서 [[1차 장계전쟁]]에 참여했다. 이에 장제스는 3월 26일 리쭝런, 리지천과 함께 바이충시를 면직시키고 광서파에 대한 토벌령을 발표했다. 장제스는 신속하게 [[탕성즈]]를 다시 불러와 호북에서 바이충시 휘하에 있는 자신의 옛 부하들을 포섭해 기반을 확보하게 하는 한편 월계군벌 [[천지탕]], [[위한머우]] 등을 포섭하여 리쭝런 세력을 꺾었다. 장제스는 리쭝런이 [[펑위샹]]과 [[옌시산]]과 손잡을 가능성을 차단한 다음에 바이충시 휘하의 지휘관들을 대거 매수하여 반격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는 곧 패하여 4월에 우한을 도로 내주어야 했고 이에 궁여지책으로 [[서산회의파]]와 합작, 5월에 호당구국군을 창설, 광둥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베트남으로 달아나야 했다. 이후 1930년 3월, 최대의 내전이었던 [[중원대전]]이 터졌지만 장제스는 [[장쉐량]]과 합작하여 여기서도 승리했다. 펑위샹 세력은 와해되었으나 광서파나 옌시산은 그런대로 건재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도 광시로 돌아와서 세력을 재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