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바이충시 (문단 편집) === 양광사변 === 1931년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발생하자 그간 장제스에게 우호적이었던 광동파들이 대거 반발, 난징 국민 정부를 이탈하여 개조파, 서산회의파, 광서파와 힘을 합쳐 1931년 5월 27일 광저우 국민 정부를 수립하고 난징에 대한 토벌을 외치며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제3차 초공작전]]에 힘쓰는 장제스와의 무력 충돌을 잠시 피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곧 호남성을 중심으로 광저우와 난징의 무력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 싸움에 속도가 붙으려는 순간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장제스의 하야를 조건으로 일단 난징 국민 정부와 도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1월 1일 [[쑨커]]가 [[행정원장]]에 취임하면서 광동파를 중심으로 한 신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리쭝런, 바이충시는 서남 정무 위원회, 군사 위원회 서남분회를 설치하여 광서성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33년 [[복건사변]]이 발생했을 때 지지를 요구받았으나 거절했고 [[제5차 초공작전]]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멸망하고 홍군이 [[대장정]] 길에 오르자 홍군 토벌에 협조하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대장정 중인 공산당을 잡겠답시고 지방 군벌들을 너무 약화시켜 [[룽윈]]을 비롯한 군벌들은 장제스에게 개입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공산당과 비밀리에 협상했고 바이충시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35년 장제스가 [[법폐개혁]]을 단행하여 각 지방의 화폐를 모두 중앙에서 발행한 법폐로 교환하고 각 지방의 은을 중앙으로 송금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광서파의 주요 수입원인 아편을 단속하고 광서 지방을 군사적, 재정적으로 포위하여 압박하면서 광서파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6년 양광 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한민]]이 급사하면서 광서파는 곧 장제스가 초공을 빌미로 자신들을 무력 토벌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광동 군벌 천지탕과 합세, 항일을 구실로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호남으로 출병하여 장제스에 대해 다시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다이리]]를 파견, 위한머우, 리한훈 등을 초섭하여 천지탕을 하야하게 하여 순식간에 광동을 제압했고 리쭝런과 바이충시를 각각 광서 수정 주임과 광서 수정 부주임에 임명하여 회유했고 광서파는 반장을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리쭝런에게 군사 위원회 상무 위원을, 바이충시에게 절강성 정부 주석을, 황샤오훙에게 광서성 수정 주임 자리를 내주어 광서파를 분열시키려고 하는 한편 리쭝런과 바이충시를 자신들의 기반인 광서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하자 광서파는 다시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다행으로 장제스 역시 항일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무리하게 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고 광서파도 무력으로 장제스를 타도하는 것까지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에 장제스가 리쭝런에게 광서성 수정 주임을, 바이충시에게 군사 위원회 상무 위원 자리와 매달 200만원의 자금 지원, 광서성을 통치할 권한을 보장하자 광서파는 다시 장제스에게 복종하기로 했다. 하지만 악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강경하게 [[장쉐량]], [[양후청]] 토벌을 주장하며 장제스가 죽기를 바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