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충시 (문단 편집) === [[국공내전]] ===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069aba3bfe65bc2ddea62b3d23bb2a5.jpg]] || || 1947년 장제스와 함께 [[린뱌오]]의 군세를 치기 전에 병사들을 둘러보는 총참모장 바이충시 || 1946년 제헌국민대회가 개최되자 바이충시는 11월 22일 [[장제스]], [[쑨커]], [[위유런]], [[후스]], [[리쭝런]] 등과 함께 주석단으로 선출되었으며 1946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바이충시는 동북 초비 사령관에 임명되어 만주로 진공, [[린뱌오]]의 공산군을 크게 밀어붙혀 하얼빈 함락을 코앞에 두었으며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공산당은 큰 위기에 몰렸다. 이에 공산당은 미국의 특사인 [[조지 C. 마셜]]에게 장제스가 정전 협정을 깼다고 호소하여 국민당 정부의 공격을 중지시키는데 성공했고 매우 귀중한 시간을 벌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정전 명령에 바이충시는 지금이야말로 공산당의 씨를 말릴 절호의 기회라고 난징으로 날아와 장제스에게 공격 재개를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미국의 눈치를 살펴 이를 거부하며 강경한 주전파인 바이충시를 중화민국의 초대 국방부장에 임명하여 만주를 떠나게 했다. 이후 바이충시는 [[1947년]] [[3월 17일]] 타이완 지역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어 [[2.28 사건]]의 수습을 맡았고 바이충시의 부임 이후에 겉잡을 수 없던 학살이 진정되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8_Incident_l.jpg]] || || 2.28 사건 발생 이후 타이완을 찾아 민심을 수습하는 바이충시 || 만주에서 장제스는 전략적 우위를 잃었고 100만에 달하는 최정예 부대도 잃었으며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절호의 기회도 잃어버렸다. 엄청나게 전력을 강화한 공산당이 자신을 인민해방군으로 선포하고 남하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게다가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영토와 부대에 집착이 강한 장제스는 각 부대들에게 무리한 사수 명령을 남발하고 일선 지휘관들을 무시한 직접 개입을 일삼아서 현장의 유연한 지휘를 방해함으로 패배에 일조했다. 국민당 정부는 만주를 완전히 잃었고 우한 근처에 대별산 해방구가 생김으로 난징도 위험해졌다. 바이충시는 33개 사단으로 대별산을 점령하고 했으나 패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의 1947년 하반기 공세로 장제스는 다시 80만 대군을 잃었다. 국부군의 사기는 땅을 쳤고 앞을 다퉈서 공산당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요심 전역의 패배로 중화민국 초대 내각이었던 [[웡원하오]] 내각이 사퇴, [[쑨커]]가 새로운 행정원장에 취임했지만 회해 전역까지 패배하면서 국민당 정부의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고 정부 내부에서는 정부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광서파가 장제스 하야를 종용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24일, 화중 초비 총사령관이었던 바이충시는 호남성 정부 주석 [[청첸]]과 연명으로 장제스 하야와 공산당과의 평화 협상을 요구했고 1949년 1월 21일 장제스가 총통에서 사퇴하고 부총통 리쭝런이 대리 총통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광서계는 공산당과 협상하여 장강을 경계로 중국 천하를 양분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공산당은 협상 따윈 안중에도 없이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가혹한 요구를 강요했다. 이에 바이충시 등의 군부는 크게 반발하여 장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끝까지 공산당과 싸울 것을 결의하면서 협상은 결렬, 공산군이 4월 20일 장강을 도하하여 난징을 점령해버렸다. 사태가 돌이킬 수 없어지자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4월 22일 장제스를 찾아가 총통에 복직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거부했다. 바이충시는 호남으로 퇴각하여 [[우한]] 수비를 맡았다. 마오쩌둥은 바이충시에게 항복한다면 광서 파벌 소속 군대 30만 명을 그대로 거느리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바이충시는 거부했다. 공산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바이충시는 포위 섬멸의 위기를 직감하고 [[창사]]로 후퇴했다. 하지만 청첸, 탕성즈를 비롯한 [[상계군벌]]들이 창사기의를 일으켜 중공에 투항함에 따라 다시 [[헝양]]으로 후퇴했다. 바이충시는 타이완의 지원을 받아가며 자신의 기반인 [[광시]]를 바탕으로 장기전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린뱌오가 헝양을 공격하자 바이충시는 린뱌오 군대를 크게 무찔러서 국공내전에서 보기 드물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쑹시리옌 등은 장제스의 총애를 믿고 바이충시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했으며 광둥을 지키던 위한머우의 군대가 무너지면서 [[광둥]]도 함락되고 임시 수도 [[광저우]]도 함락되어 수도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갔다. 결국 바이충시도 호남과 귀주를 포기하고 [[구이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데 쑹시리옌이 바이충시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충칭으로 달아남으로 큰 구멍이 생겼고 린뱌오가 기습을 가해왔다. 바이충시는 4개 사단을 잃었고 구이린도 내주어야 했다. 바이충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결국 부하들을 나누어 일부는 난닝으로 일부는 하이난으로 달아났는데 2만명만 탈출에 성공했다. 충칭이 함락되고 대륙에서의 최후의 수도인 청두까지 밀린 후 중화민국 정부는 12월에 [[국부천대]]를 단행했다. 바이충시는 [[하이난]]으로 퇴각했다. 장제스는 바이충시에게 총통부 전략 고문 위원회 부주임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하며 그에게 대만으로 가자고 했다. 리쭝런이 바이충시에게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부추겼지만 바이충시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대만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대만에서 한직에 머물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