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킹 (문단 편집) ===== 아일랜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ublin_c._1000.jpg|width=100%]]}}} || || '''{{{#40E0D0 바이킹들이 세운 1000년 경의 [[더블린|{{{#40E0D0 더블린}}}]] 모습}}}''' || 795년 경에 소규모 바이킹 무리들이 처음으로 [[아일랜드]] 해안가를 따라 수도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굳이 수도원들을 약탈했던 이유는 그 주변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 바로 수도원이었기 때문. 821년에는 호우스를 약탈하고 수많은 여자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840년부터는 아예 요새화된 숙영지를 지어놓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아일랜드에 더욱 체계적인 약탈행위를 해댔다. 이때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더블린]]. 물론 이 이전에도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지만 바이킹이 모두 불태웠으며 교역 번성지로 떠오르게 된 것은 바이킹이 이 곳을 본거지로 삼은 이후부터다. 아예 터를 잡은 바이킹들은 거대한 함대를 조직하고 대규모로 약탈을 저질렀다. 바이킹들은 내륙으로 쳐들어가 더 거대한 수도원을 공격하거나 고대 아일랜드 왕들의 무덤을 도굴했다. 853년에는 바이킹 올라프가 더블린의 초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수십여 년 동안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원주민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더이상 바이킹들이 일방적인 약탈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아 아일랜드 토착세력들과 끊임없이 합종연횡을 반복했다는 것. 바이킹이 항상 승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866년에 아일랜드 북부에 있는 모든 바이캉 정착지들을 불태우고 약탈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902년에는 최대 중심지였던 [[더블린]]에서 강제로 쫒겨났다. 하지만 아일랜드 바이킹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 이바르 가문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는 914년 아일랜드로 돌아와 8년 동안 전쟁을 벌였고, 결국 더블린을 회복했다. 바이킹들은 파괴만 했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 리머릭 등이 이때 지어졌다. 더블린은 아일랜드 최초의 대도시로 부상했고 '''서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노예항구'''라는 웃지못할 타이틀을 짊어지기도 했다. 바이킹들은 날이 갈수록 아일랜드 토착 [[게일인]]들과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노르드-게일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더블린의 바이킹 왕들은 문화를 진흥한다는 명목으로 아일랜드 최초의 조폐국을 설립했고 심지어 교회를 후원해주기까지 했다. 현대 바이킹들에 대한 인식이 그냥 쳐죽이는 야만인인 것에 비하면 놀라운 점. 이후 [[게일인]] 출신인 미데 왕국의 '말 세크날 막 돔날' 왕이 더블린을 정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게일인 출신의 브라이언 보루가 전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아일랜드의 '하이 킹'으로 올라서면서 바이킹의 세력은 더욱 약해졌다.[* 그래서 브라이언 보루를 '바이킹의 아일랜드 침공'을 종결시킨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정복당한 바이킹들은 게일인들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죄다 진압당했고, 1014년 이후로는 제대로 된 반란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약소 세력으로 전락했다. 이후 바이킹들은 자연스레 아일랜드 문화권에 흡수되면서 사라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