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킹 (문단 편집) ==== 아이슬란드 · 그린란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he-renovated-norse-ruins-at-qassiarsuk-in-south-greenland-by-stacy-william-head-1-1400x1000.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A35E78B-944A-4B54-A8EB9C94DE5F72C8_source.webp|height=300]]}}} || || '''{{{#40E0D0 그린란드의 바이킹 식민지 재현가옥}}}''' || '''{{{#40E0D0 바다코끼리를 사냥하는 바이킹들}}}''' ||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라는 2개의 거대한 섬을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페로 제도]]의 첫 정착민들 중 하나이자 바이킹이었던 나도드(Naddodd)가 노르웨이에서 페로 제도로 항해하던 중 길을 잃고 우연히 한 거대한 섬의 동부 해안가로 표류했고, 이 것이 아이슬란드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한 스웨덴 선원이 아이슬란드 해안으로 표류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일부러 아이슬란드를 찾아간 사람은 '흐라프나플로키 빌게르다르손'이었다. 그는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었고, 거대한 피요르드 사이에서 떠다니는 유빙을 보고 현재의 이름 '아이슬란드'를 붙였다. 아이슬란드는 870년이 돼서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심지어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의 이름도 남아있는데, 잉골프 아르나르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 족장으로 아내 할베이그 프로데스다테르와 함께 아이슬란드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잉골프는 아이슬란드가 가까워지자 배 밖으로 2개의 나무기둥을 던졌고, 그 기둥이 다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정착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는 나무기둥이 닿은 곳에 닻을 내렸고, 땅에서 증기가 솟아오르는 따뜻한 곳에 집을 지었는데 이 곳이 바로 [[레이캬비크]]다. 한편 아이슬란드보다도 한참 멀고 북쪽에 떨어진 [[그린란드]]는 한참 후에야 발견됐다. 985년 전설적인 탐험가 에이리크 힌 라우디가 3년 전 살인 혐의로 본국에서 쫒겨난 이후 바다를 이곳저곳 떠돌다가 그린란드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그린란드를 발견한 에이리크는 986년에 탐험에서 14척의 배들을 가지고 귀환했다. 에이리크는 이때 그린란드에서 그나마 살만한 남서부 해안가를 식민화했다. 그러나 그린란드가 하도 북쪽에 있어서 짧은 여름에만 겨우 호밀과 보리를 재배할 수 있었고 양과 소 정도를 키우며 근근히 연명하는 정도였다. 그린란드의 특산품은 [[바다코끼리]] 상아. 현지에서 생산할 수 없던 철과 생필품들과 거래해서 먹고살았다고 한다. 그린란드는 1261년 노르웨이 국왕의 속령이 되었다. 하지만 무려 3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인구는 크게 증가하지 못해서 그 넓은 땅에 고작 5천 명도 못되는 인구만이 살았다. 그린란드는 크게 동부 식민지와 서부 식민지로 나뉘어졌는데, 이 식민지 커뮤니티는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약 250여 개의 농장, 14개의 교회, 1개의 대성당이 있었다. 그린란드의 가톨릭 교구는 노르웨이의 니다로스 대교구 관할이었고 주교도 있었지만 절대다수의 주교들은 그 먼 그린란드로 떠나기 싫어해서 대부분 니다로스에 머물렀다. 그러나 1300년대에 [[소빙하기]]가 몰아닥치고, [[이누이트]]의 공격을 받자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고 그린란드 식민지는 점차 쇠퇴했다. 1450년까지는 아예 노르웨이 본국과의 연락이 끊길 지경이었고 그린란드는 아예 스칸디나비아 전설에나 등장하는 신비의 섬 수준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질 뻔 적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