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쿠 (문단 편집) ===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과 해체 이후 === [[파일:모스크 바쿠.jpg|width=800]] 13세기 시르반샤 패루흐자드 2세가 7대 이맘 무사 알 카딤의 딸 파티마의 무덤을 기리며 세운 비비 헤이바트 모스크. 1911년 확장되었으나 1936년 [[소련]] 시절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재건되는 굴곡의 역사를 지녔다. [[소련]] 시절에는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이우]], [[타슈켄트]] 다음가는 소련 제5의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0년 초, 연합군은 바쿠의 정유 시설을 폭격하는 '파이크 작전'[* 그 시기 소련과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독일은 기술, 소련은 석유를 제공하는 거래 협정을 체결한 상태였다. 당시 연합국 시점에서는 양자 모두 불가침 조약을 깰 동기가 없었으므로, 시추 시설을 폭격하여 독일로 흘러들어가는 석유를 차단, 군사적 역량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을 추진하였으나 나치 독일이 프랑스 본토를 침공함에 따라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이후 벌어진 [[독소전쟁]]의 주요 원인도 히틀러가 바쿠의 유전을 노렸다는게 정설이다. 군 수뇌부는 차라리 모스크바에 전력을 집중하길 추천했으나 히틀러는 계속 이 바쿠의 유전지대에 집착했으며, 기어이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A군을 캅카스 지방으로 파견하여 전투를 치르게 하였다. 한편 이들을 엄호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휘하의 B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게 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그 결과는....]] 소련 말기에는 석유 생산량이 감소하기도 했으나, [[1991년]] 아제르바이잔 독립 이후에는 다시 석유 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인구 1백만을 돌파하였으며, 1970년대 들어서야 아제리인이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게 됐다. 1988년까지만 하더라도 [[아제리인]], [[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이 공존하는 다민족 도시[* 1979년 기준 아제리인 52.4%, 러시아인 22.7%, 아르메니아인 16.5%, 유대인 2.3%, 기타]였다. 그러나 소련 말기의 민족 분규로 소수민족은 거의 떠나고, 2009년 2백만을 돌파한 바쿠 인구 중에서는 러시아인들만이 인구 1%를 넘는 유의미한 소수민족(5.3%, 10만)으로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