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경리 (문단 편집) == 생애 ==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시|통영군]] 통영면 대화정(현 통영시 문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금이'로,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진주공립고등여학교]]를,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세간에는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세종대학교]]의 연혁을 감안할 때 박경리는 수도여자사범대학의 전신인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현 [[세종대학교]]) 가정과 1기 졸업생이다.] 불행한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박경리의 부모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14살, 어머니는 17살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대로 결혼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다. 박경리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때때로 어머니의 강요로 아버지 집에 가서 경제적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 어머니보다 아버지 쪽 기질을 훨씬 물려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길거리에서 아버지를 마주치게 되면 얼굴을 돌리고 지나칠 정도로 분노와 경멸을 느꼈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에 대한 연민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은 본인의 대표작 <토지> 속에 '이홍'이란 인물로 드러난다. 또한 이홍의 큰딸 '이상의'는 박경리 본인의 성격과 학창시절 경험이 많이 투영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에 대한 분노는 그녀를 극단적인 고독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다 보니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이 바로 독서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하여 책상 밑에 소설책을 숨겨 놓고 읽었다. 소박 맞은 모친이 바느질 등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가야 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 원 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 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수필 ‘십이년 만에’) 학창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진주여자고등학교|고등여학교]] 시절을 통해선 “마치 동굴 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 외롭게 지냈다고 한다. 다른 학과목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박경리가 유일하게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독서에 대해선 ‘야욕’을 부렸을 정도였고,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유일한 벗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때론 이불 속에서 들킬까 노트를 감춰가며 매일매일 일기 같은 시를 썼다. “묶여 있다는 의식이 종이에 소리 없이 폭발했다고 나 할까”(‘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나남, 1994).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거제 출신의 김행도[* 박경리 "남편은 도쿄에서 학교 다니며 독립 운동 하다 일본에서 형무소 살이를 1년 했어요. 성질이 고지식하고 괴팍한 사람인데 단식 투쟁을 해서 형사가 형무소까지 와서 취조를 했대요. 형사한테 그릇을 막 집어던졌다나요? 결혼한 후에야 일본에서 형무소 살이한 것을 알려주더라고요. 일본인 교사의 도움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고 해요"[[https://woman.donga.com/3/all/12/132543/1|#]]]와 중매 결혼하고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박경리는 이러한 일들을 당하면서 겪어야 했던 엄청난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쓴 것이 글을 쓰기 시작한 한 동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정식 작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경리가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문단의 중견 작가였던 [[김동리]]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진주여자고등학교|고등여학교]] 선배였던 김동리의 부인네 집에 친구가 세 들어 살고 있었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친구가 말해버리면서 본의 아니게 박경리의 글이 김동리에게 읽히게 된 것이다. 당시 박경리는 소설보다는 시를 주로 쓰고 있었는데, 박경리의 시를 처음 본 김동리는 '상(想)은 좋지만 아직 (완성은) 안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김동리는 신춘 문예에 시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당시 박경리는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이런 망신을 당하게 하느냐"며 친구를 원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동리는 박경리에게 계속 작품을 가져와 보라고 말했고, 이후에는 시도 좋지만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던 시기였는데,[* 실제로 박경리의 등단은 여성 작가로서는 1949년의 [[강신재]] 이후 근 7,8년 만이었다.] 습작을 들고 문예 살롱을 찾아오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경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고, 자신을 그린 스케치가 살롱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일어나고 부터는 큰 모욕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안 하겠으니 자신이 제출한 원고를 모두 돌려 달라고 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던 중 김동리의 아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현대 문학[*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했던 울산 출신의 소설가 [[오영수(소설가)]]가 현대 문학의 편집장이었고 오영수의 도움으로 추천을 받게 된다]' 지에 추천되었으니 빨리 와서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는다. 박경리가 제출했던 습작들 중 '불안지대'라는 제목의 소설의 원고를 김동리가 가지고 있다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문예지에 추천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박경리는 연락을 받기 이전에 이미 '계산'이 수록된 '현대 문학' 지를 우연히 '''자기 작품이 수록된 줄도 모르고''' 훑어보았는데, 작가 이름도 작품 제목도 바뀌어 있으니 자기 작품인지 못 알아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추천을 두 번 받아야 정식 등단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았는데, 박경리는 첫 추천을 받고 부터 비교적 늦은 편인 1년 후인 1956년 단편 '흑흑백백'으로 다시 추천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박경리는 이후 자신을 등단시켜 준 김동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밝히기도 했다. 등단 직후에는 '불신시대'를 비롯한 단편 소설을 많이 썼으며, 50년대 말부터 6,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장편 소설을 많이 썼다. 초기작 중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 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자전적인 작품이 많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안겨준 ‘불신시대’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다, 마침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 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독백 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 현실에 대한 각성과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의식 전환을 보여줬다. 장차 진화해나갈 박경리 문학의 밑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박경리는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해왔던 당대의 한국 작가들과는 다르게 예외적으로 장편을 많이 쓴 작가로서, 그가 쓴 장편은 토지를 제외하고도 20여 편에 이르고, 특히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은 명작이라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표류도#원작 소설]], [[노을진 들녘]], [[가을에 온 여인]] 등을 썼는데, 나머지 장편 소설들의 경우는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박경리는 1958년 <불신시대>로 현대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상한 다음 다음날 또다시 화재라는 액운을 만나 사과 궤짝의 살림 살이나마 다 날려버렸다. 그때 마침 딸아이는 중학교 입시의 시기였으므로 울었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박경리는 글을 쓰고 또 써서 “영화 원작료다, 인세다, 원고료다 하며” 돈을 벌었다. 박경리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구러 하는 동안 나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디다 쓴 일도 있지만 소설가란 내게 천직이었던 모양으로 나는 어떤 직장이든 붙어있질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박경리를 걱정했다. “[[김말봉]] 선생님께서도 신문사를 그만둔 일을 꾸중 하셨고 내 자신도 어쩔 참인지 다만 막막하기만 했다.” 박경리는 이른바 ‘인기’나 ‘출세’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세속적인 성공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문학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는 의심과 자문자답은 나를 허황하게 흩뜨려 놓고 보다 깊은 고독과 사람을 만나기 꺼리는 경향을 짙게 했을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다. 1962년 박경리는 전작 장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당시 장편 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 된 다음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책으로 묶어내는 게 하나의 경향이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례적으로 바로 책으로 출판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바로 독자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박경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전업 작가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이 1990년대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93년에 1쇄를 발행한 ‘김약국의 딸들’은 1995년까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거듭했다. ‘김약국의 딸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모티프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이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은 이 언어적 모티프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으로 일관한다. 리얼리즘 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연속해서 중첩되는 현상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개연성을 지탱한다.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적 배경과 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신비한 장치들이 작품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언어의 주술성과 폐가를 중심으로 한 장치적 모티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나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삽입 가요, 뚜렷한 설화적 구성 원리 등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토속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으로 나뉘고, 이 두 계열은 ‘토지’에서 융화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약국의 딸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1964년에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장과 전장’은 박경리의 1960년대 대표작으로, 사적 담론의 수준을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돌파한 작품이다. 작품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주인공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감상적이고 결벽증을 가진 인물에서 억척스러운 아내이자 어머니로 변신한다. 작품 속의 ‘전장’은 더 이상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고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 또한 여주인공에게 전쟁은 이념으로 포장된 헛된 구호에 불과할 뿐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도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그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 전쟁이 어느 한편에 가담할 수 있는 어떤 명분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생존을 위한 신중함’으로, 또는 ‘현실을 좇는 현명함’으로 전쟁을 관망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주범이 바로 전쟁임을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고발했다. ‘시장과 전장’은 6·25전쟁을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문제 삼은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때까지 무수하게 나온 그 어느 작품보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전쟁이 지니고 남긴 상처, 가령 사회악, 인간성의 타락 내지 상실, 개인적인 비극과 빈곤, 인간적인 본능 등의 문제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1969년]] 그녀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토지(소설)|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9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써냈다. 사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상일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집필에만 몰두했으며, 1부를 쓰던 중 암 선고를 받고 수술까지 하는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설 ‘토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긴 호흡을 자랑하는 본격 대하 장편 소설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펼쳐진 작가의 상상력은 소설을 넘어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남는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영어·일본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딸 김영주는 1973년에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다. 토지를 집필하던 중 김지하가 사형 선고를 받는 등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만 딸이 결혼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지하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15일 밤 9시 40분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는데, [[김훈(소설가)|김훈]]의 수필 중에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당시 기자였던 김훈은 자신이 본 그 날의 박경리의 모습에 대해 말하지 않다가 솔 출판사에서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완간하고 난 뒤 선생을 추모하는 여러 사람들의 글을 모아 1994년 펴낸 <수정의 메아리>라는 책에서 이 글을 기고하면서 그 날 자신이 보았던 박경리 선생의 모습을 세상에 밝혔다. 이 글은 [[2015년]] 펴낸 김훈 자신의 수필집 <라면을 끓이며> 말미에 실렸다.]라는 제목으로, 김지하 시인이 풀려났던 그날 추운 겨울 바람 속에 생후 10개월 된 손자[* 1974년 4월 19일에 태어난 김원보(金圓甫).]를 업고 나와 [[택시]]를 대절해 놓고 사위를 기다리던 박경리의 모습을 목격하고 이를 글로 담아낸 소품이 있다. 하지만 김지하는 교도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미리 준비해 온 차를 타고 가버려 길이 엇갈렸다고. 김지하가 석방된 2월 15일은 백기완 시인도 함께 석방되었는데, 교도소에서 백기완이 6년 전에 국민투표 법 위반으로 벌금 10만원 형을 선고 받은 전과가 있는데 그걸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할 수 없다고 하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벌금 모금을 하는 와중에 교도소 정문 앞 광장까지 와서 만원 짜리 몇 장을 꺼내서 옆에 있던 대학생에게 "학생, 이 돈을 좀 보태시오"라며 준 다음 대절해온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2003년 토지에 이어지는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한 소설 '나비야 청산(靑山)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통영시 산양읍에 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당시 현직 대통령인 [[이명박]]이 아산병원 빈소로 찾아가 분향을 하면서 금관 문화 훈장을 직접 추서했다. 뒤이어 전직 대통령과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줄줄이 분향했고, 갓을 쓴 노인부터 젊은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생전 작가와 아무 면식도 없던 시민과 애독자들이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모습이었다. 5월 8일 서울 아산병원 영결식장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는 조사를 다문다문 읽어내려가다 끝부분에 이르러 끝내 울먹임을 감추지 못했다. >'''“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그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전 참 염치도 없지요.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어 자자손손 파 먹어도 파 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화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영결식 후 노제(路祭)가 열린 원주의 거리마다에는 근조의 플랜카드가 걸렸고, 통영에는 어린 학생에서 촌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민이 몰려 나왔다. 원주에서의 노제를 포함해 발인부터 안장까지 영구는 무려 여섯 차례의 행사와 제사를 치러야 했다. 박경리는 [[1965년]]부터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지금의 주소는 성북구 정릉동 768-2번지(도로명 주소는 보국문로 29가길 11)로, 지금도 남아 있지만 지금은 정릉 발도르프학교라는 대안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다.[[https://fjwaldorf.modoo.at/|#]] 2013년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는 했지만 예산부족으로 서울시가 매입을 하지 못했다고.[[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919020004|#]] ]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을 떠나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해서 토지 4, 5부를 집필하고 탈고했는데, 그 때 박경리가 살던 집은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그 집이 택지 개발지에 들어가게 되자 1998년 흥업면 매지리의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와 가까워, 석좌교수로 강의를 오기도 했다. 사후 미래캠퍼스 내의 청송관(인문예술대학 건물) 옆에는 박경리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고 청송관 내부에는 [[북카페 토지]]라는 공간이 생겼다. 북카페 안에는 박경리의 유품 일부도 전시되어 있다. 사후인 2011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1회 수상자인 [[최인훈]]을 시작으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메릴린 로빈슨(미국),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응구기 와 티옹오(케냐) 등이 수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