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관현 (문단 편집) === [[서울의 봄]]과 [[5.18 민주화운동|5.18]] === [[파일:1348562133-10.jpg]] [[youtube(KPKtk-Pblvw)] >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남도민, 아니,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 연설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전국의 각 대학들은 다시금 활발하게 민주운동과 학생운동에 나섰다. 전남대학교 또한 그 변화의 물길 가운데 서 있었다. 박관현은 1980년 4월의 총학생회 선거에서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는 한 달 후에 있던 민족민주화성회를 주도했다. 거기서 박관현은 일장 연설을 한 후 [[5.18 민주화운동|"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고 말했다. 하지만 곧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그를 포함한 학생지도부는 검거 대상으로 들어갔다. 박관현은 동지들과 함께 급히 도피했다. 그는 먼저 전남 여수로 갔다가 서울의 동생 집을 통해 인근 친척집에서 은신하게 된다. [[제수]]의 소개로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신군부에게 잡히지 않고 박관현은 1년 정도 버텼다. 하지만 그는 5.18 때 죽어간 [[윤상원(1950)|친구]]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숨어서 사는 놈'이라는 독백도 자주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현상금을 노리는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1982년 공장으로 출근하던 길에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 은신처를 제공해주었던 제수도 붙잡혔는데, 서울로 이송되면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br]제수 : 왜 피하지 않았느냐. [br]박관현 : 죄인도 아닌데 왜 피하느냐. '''죄인은 바로 신군부다.''' 5월 진실을 밝혀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