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근혜/비판/자질 (문단 편집) == 박근혜의 특이한 성장 배경 == [[박근혜]]는 절대적 권력자였던 [[박정희]]의 딸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 즉, 인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인 9세 때(1961년)부터 인격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27세(1979년)까지, [[재벌]] 2세들도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일반인, 사회에서 격리된 채 살아왔으며[* 대부분 최소 30~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여러 경력을 쌓고 대통령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들의 자녀들 역시 사회 진출을 마쳐 일반인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 [[전두환]]의 3남 1녀 역시 늦둥이 [[전재만]]을 제외하고 최소 고등학생 이상의 나이에 청와대에 입성했으며, 장남 [[전재국]]과 장녀 [[전효선]]은 아예 임기시절의 반을 결혼해 [[미국]]에서 유학하며 보냈다. 막내 [[전재만]]은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절대권락자의 자식으로 보냈다는 점이 박근혜와 같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겨울방학때 아버지의 임기가 끝나 일반인으로 돌아왔다.] [[청와대]]에서 나와 [[1998년 재보궐선거]]에 당선되기까지를 합하면 심지어 자신의 친남매들과도 인연을 끊다시피하며 특정한 사람들하고만 교류하며 살아온 것이다. [[박근혜]]는 중학교 입시[* 본래는 전 과목을 시험보는데, 박근혜가 중학교 입시를 치를 때는 "어린이들의 수험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국어와 수학 두 과목만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다시 원래대로 전 과목을 시험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때도 특혜를 받아 [[가톨릭]]계 명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수녀회]]에서 설립한 학교. 성심수녀회는 한국에 성심국민학교(여학교),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성심여자대학교]]를 세웠는데, 설립 초기 성심학교는 소수 정예 교육으로 유명했다. 실제로도 성심학교 학생들은 있는 집 딸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지금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의 강의동은 [[정주영]]이 기부했다. 외동딸이 성심여대에 다녔기 때문. (성심여대는 1995년 가톨릭대에 통합되어, 가톨릭대 성심교정이 되었다.)]에 합격했고, 같은 재단인 [[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0년 3월 명문대학인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다만 [[서강대학교]]는 박근혜가 입학할 무렵에는 개교한 지 10년밖에 안 되는 신생 대학교였고, [[종합대학]] 인증도 박근혜가 입학한 해인 1970년에 받았다는 점은 감안하자. 그 시대 한국 대학 중에서 드물게 제대로 된 교육 과정을 갖추고 엄격한 학사 관리를 했던 유망한 대학교였으며 1980년대를 기점으로 명문대학교로 떠올랐다.] 서강대에서는 어려운 학과인 [[전자공학]]을 주전공으로, [[물리학]]을 부전공으로 하여, 평점 3.82/4.00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3571506|기사]]. 명문대 [[이공계]]([[전자공학과]]) 출신임에도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이명박]] 후보가 [[기후변화]] 협약에 관해 질문하자 [[이산화 탄소]] 혹은 [[탄산]]가스(모두 CO,,2,,를 의미)를 "이산화가스"라는 어처구니없는 명칭으로 말해서 비난과 조소를 받은 바 있다. [[이산화 탄소]]가 [[온실가스]]라는 것이나 온실가스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 등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박근혜 화법]]으로 얼버무렸다.[* [[박근혜]] 후보의 답변. "굉장히 준비를 잘 해서, 법적인 조치를 잘 하든지, 이런 거에 대해서 커다란 부담을 갖지 않도록, 정부가 유도를 하고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떡하면 이산화가스, 산소가스… (이하 생략)" 온실가스에 대한 규제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기 때문에 [[교토 의정서]]가 발효된 것이다. 당연히 [[박근혜]]가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 마나이다. 더구나 [[산소]]를 '산소가스'라고 지칭하는 것은 둘째치고, 산소가 온실가스에 들어간다고 잘못 알고 있다. 수증기(H,,2,,O)와 산소(O,,2,,)를 헷갈려서 산소를 온실가스로 착각한 것이라고 항변한다고 해도, 박근혜는 분명히 정상적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그것도 [[이과]])를 나와서 [[서강대학교]]에서 부전공으로 [[물리학]](특히 열역학)을 배웠는데, 헷갈려하는 게 더 이상한 것이다.] 또한 2012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원자력 발전소]] 안전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자,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s-2.2|그 문제는 제가 대통령이라면 확실하게 할 겁니다]]."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4년 8월 15일에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어머니 육영수가 사망하면서]] [[퍼스트 레이디]] 자리를 대신 수행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퍼스트 레이디로서 본인이 뚜렷한 성과를 남겼으면 그 또한 국가 지도자로서 자질과 경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도 박근혜는 [[육영수]]의 대용품일 뿐이었다. 1979년에 [[10.26 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이름만 걸어 놓은 재단([[영남대학교]], [[정수장학회]])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20년 내외를 인의 장막 속에서 지냈다. 1981년에 박근혜는 영남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자질이 모자르다고 학생들이 반발해서 7년만에 쫓겨났다. 게다가 [[전여옥]]이 지적했듯이 제대로 된 [[독서]]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길라임#s-2]] 해프닝에서 알 수 있듯이 저녁 시간 대부분을 TV [[드라마]] 시청으로 보낸 만큼[* [[박근혜]]가 [[드라마]]광이라는 사실은 여러 일화에서 교차 검증이 되었다. 가령 2012년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횡설수설하다가도 TV 시청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달변가로 변할 만큼, 모든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꿰고 있었다. 참모로 일했다가 결별한 [[이혜훈]]과 [[전여옥]]의 증언도 그렇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드라마]] 관련 행사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고 참가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가 터진 그 시점에서도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다.] 박근혜의 지적 수준이나 현실 인식 수준이 어떠할지는 불 보듯 뻔했던 셈이다. 더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지금까지 모든 일을 [[최태민]]과 [[최순실]] 일당이 결정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한때 측근이었던 [[전여옥]]과 [[이혜훈]]은 '회의 때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잠시 나가서 어디에 전화를 해보고, 돌아와서 결론을 내리곤 했다.'고 증언했다. 현실이 이런데도 [[박근혜]]의 지지 세력은 단지 박정희의 적녀(嫡女)[* 원래는 [[김호남]]이 전처, [[육영수]]가 후처지만, 박근혜 지지 세력들은 박재옥을 [[서자|서녀]] 취급하며, 박정희의 적녀는 박근혜와 [[박근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돌]]이나 [[여신]]처럼 그녀를 숭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이나 업적이 전무함에도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설령 [[전제군주제]] 시대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선대 왕의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본인의 실적이 저조하다면 백성들은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선]]의 제10대 국왕인 [[연산군]]이다. 연산군도 성군이라는 [[성종(조선)|성종]]의 적장자였지만, 폭거를 일삼다가 쫓겨났다. 심지어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 일가, [[프랑스]]의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부부, [[영국]]의 [[찰스 1세]]는 폐위된 뒤 [[총살]], [[참수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전제군주제]] 체제에서도 이러한데 [[민주주의]] 체제에서 순전히 그저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숭배를 받았으니,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을지 뻔하다.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리며 [[한나라당]]의 쇄신과 [[새누리당]]의 상승을 이끌었지만, 정작 본인이 한 것은 그냥 얼굴마담이었고, 전략이나 비전을 세우거나 제시하지도 못했다.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 상승세를 지속적으로 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박근혜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었다. [[19대 대선]]에서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가 20% 대의 득표율을 점유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박근혜를 성토하는 보수층들 또한 매우 많았기에 파면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충격으로 다가와 선거 초반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 미만을 기록하던 상황에서 , 홍준표의 보수층 공략 발언으로 확고한 보수색이 결집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까닭이다. 게다가 그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의 실체가 바로 안방 챔피언이라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마치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을 6-1로 이기고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2-0으로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경기가 치뤄진 장소가 [[에스타디오 에르난도 실레스]] 스타디움 한정이라는 문제점이 존재하듯,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 5선 의원이라고 하지만 마지막은 [[비례대표]]이며 나머지 4곳 모두 오직 [[달성군(선거구)|대구광역시 달성군]] 단 한 곳에서만 출마했다. 만약 박근혜가 反 [[박정희]] 성향이 전국에서 최고로 쎈 [[광주광역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립지역인 [[대전광역시]]에서 출마했다면 당선을 보증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그리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는 대선토론 당시 본인의 부족한 자질을 여실히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정희]] 후보가 지 혼자 [[네거티브]] 전략으로 출마한 뒤 대선토론에서 "박근혜를 낙선시키려고 출마했다"라는 말을 한 후 [[문재인]]과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한 뒤 후보 사퇴를 하는 바람에 보수 지지층이 탄탄한 조직력으로 결집한 데다가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이었던 [[임수경]]이 [[탈북자]]를 변절자라 호칭한 발언으로 인해 국가안보에 불안감을 느낀 중립층이 박근혜를 지지한 것 등 여러가지 요소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특유의 자질부족으로 인해 이 많은 버프들을 받고도 불구하고 진땀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박근혜는 계속 자질 외적인 요소의 버프를 많이 받아온 게 사실이다. [[박근혜]]가 대선 레이스에 오르고 그 전보다 대중에 더 많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자질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지지자들은 이를 극단적으로 감싸고 현실을 부정했다. 그래서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나라를 위하기는커녕 망쳐버리는 정책만 펼쳤다. 열렬한 지지자들은 타 후보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깐깐하게 검증을 하면서, 박근혜 당시 후보에 대해서는 상대방이 곤란한 질문 하나만 던져도 '싸가지가 없다' 혹은 '어떻게 저 따위 질문을 하냐'라며,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쏟아냈다. 박근혜와 그녀의 동생들인 [[박근령]]과 [[박지만]]은 어떠한 공로도 없고 각각 물의들만 자주 일으켰을 뿐이다. [[박지만]]의 경우 젊었을 때부터 마약 등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고, 현재 회장직을 맡아 경영하고 있는 주식회사 EG도 사실상 본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했던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 [[현대그룹]]의 정주영이나 [[삼성그룹]]의 [[이병철]]처럼 스스로 노력하여 창업한 것도,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를 제외한 [[유한양행]]의 역대 [[대표이사]]들처럼 평사원으로 입사해 30년 넘게 수많은 경쟁을 뚫고 이 자리에 오른 것도[* 대표이사는 이미지가 회사 내에서 제일 높은 데다 이마저도 임기가 정해져 있어 (최대 6년) 대표이사 임기가 끝나면 퇴사해야 한다. 게다가 유한양행 대표이사 자리는 내부 승진이 원칙이다.] 아니다. 그리고 [[박근령]]은 여러 지탄을 야기한 본인의 각종 망언과 사기 범죄 행위를 논란을 일으켰을지언정 늙을 때까지 [[미혼]]으로 지내고 어머니 [[육영수]] 사망 후 영세교 교주 [[최태민]] - [[최순실]] 부녀에게 세뇌되어 놀아나며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 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저지른 언니와는 달리, 최태민 - 최순실 부녀 등과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최순실]]과 [[최태민]]에 대해서 "언니의 인생을 망친 인간들"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던 게 박근령이었다. 실제로 박근혜의 동생들과 최순실의 사이는 굉장히 안 좋았다.] [[박근령]]은 1979년 10.26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후 류찬우 [[풍산그룹]] 회장의 장남 류청 PMX인더스트리 사장과 [[결혼]]했으나 얼마 못 가 [[이혼]]하고 2008년에 현재의 [[남편]]인 [[신동욱(1968)|신동욱]] 공화당 총재와 [[재혼]]했으나 재혼한 남편의 정치 활동과 기괴한 행동, 신동욱과의 재혼 과정에서 언니 박근혜와 남동생 박지만의 견제와 반대, 본인의 경제 관념 미비로 금전 문제와 빈곤을 겪는 등 평탄하지 못한 일생을 보냈다.[* 사실 신동욱과 재혼하기 전 박근령의 재산들도 그리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재산들을 박근령이 신동욱과 재혼한 후 신동욱이 박근령이 갖고 있는 돈들을 정치자금으로 대거 탕진하면서 가난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사람을 박근령의 눈과 귀, 입을 막고 박근령을 이용하여 박근령의 재산들을 강탈하려는 악질 사기꾼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자세한 건 [[신동욱(1968)]] 문서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