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기영(교수) (문단 편집) == 참여 정부 시절 == 참여 정부 탄생 직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비서실]] 정보과학기술보좌관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특별히 세간에 알려질 일이 없는 일종의 과학 분야 자문직이었는데, 2004년 당시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황우석]]의 정책적 지원자를 자처하면서 같이 유명세를 탔다. 이 시기에 황우석은 참여정부의 고위직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연구상의 편의와 특혜를 받았는데, 언론에선 이 네트워크를 황우석-박기영 보좌관-[[김병준(정치인)|김병준]] 정책실장-[[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이렇게 4명의 성을 따서 황금박쥐라고 불렀다.[* '황김박진'이지만,金은 금으로 읽고 진은 발음이 비슷한 쥐로 치환. 공교롭게 이중에서 학자 출신인 황우석, 박기영, 김병준은 모두 논문 논란으로 무너졌다. 학문적 성과와는 별개로 연구윤리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50064|황금박쥐들에 대한 추억]]. 한편 이중 김병준, 진대제는 보수 쪽으로 전향했다.] 이중에서 박기영은 각종 명목으로 국가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실무자였다. 대표적인 예로 [[http://scieng.net/sisatoron/2095|최고 과학자 국가 관리 방안]]이 있다. 이 방안의 1차 수혜자는 당연히 황우석. 그에 대한 보답(?) 차원인지 [[황우석]]의 연구에 직접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데도 황우석의 [[http://science.sciencemag.org/content/303/5664/1669|사이언스 논문]]에 13번째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링크한 논문은 조작으로 드러나 철회되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논문이 아니다.] 이에 대해 논란이 일자 박기영 교수는 이 논문에 생명 윤리와 관련된 자문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난자 기증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결국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황우석 사태]] 발발 이후 결성된 서울대 조사위의 최종 보고서에서는 박기영이 '기여한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박기영은 황 전 교수의 논문 조작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06년 1월 불명예 퇴진하고 순천대 교수로 복직했다. 그러나 참여정부 말에 '국정운영에 참여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퇴임했다'는 이유로 황조근정훈장을 받아서 빈축을 샀다. 이에 대해 당시 참여정부는 "정무직 1년 이상 근무자 중 특별히 배제 사유가 없는 경우 수여하는 것이 관례이며 따라서 통상 관례에 의해 수여한 것"이라고 해명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 한편 황우석이 몰락하기 전 황우석으로부터 2억 5천만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서 물의를 빚기도 했는데 지원 내역이 본인의 전공인 식물생리학과 거리가 있는데다 황우석의 위탁연구인데도 딱히 황우석의 논문이나 연구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박기영은 이에 대해 나름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05341|해명을 했다]]. 하지만 서울대 조사위의 조사결과와 해명 내용이 [[http://www.hani.co.kr/arti/society/health/95926.html|달라서]] 문제가 됐는데 이에 대해 딱히 추가 해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기영은 정무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노무현 대통령 및 참여정부 인사들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는데, 순천대 교수 직함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 결성된 노무현재단에서 전남지역 상임대표를 맡고 있으며 18대 대선 때는 문재인 캠프의 ‘담쟁이포럼’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민주당 비례대표를 두 번 신청했는데 19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공천에서 탈락했으며 20대 총선에서는 23번을 배정받았으나 당선자가 13번에서 끊기는 바람에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다. 게다가 순천대에서 17년간 교수로 재직했음에도 연구실적이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 박기영 교수는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논문이 40여편에 이른다고 주장했으나 본인의 이름이 1저자 또는 교신저자로 등록된 논문은 2014년 2편을 마지막으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본인이 주도한 연구는 없고 남의 연구에 편승만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바로 앞 단락의 정치행보도 그렇고 전형적인 [[폴리페서]]로 비춰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후술되는 사건이 없었다면 굳이 이런 부분까지 거론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문서 자체가 만들어 질 일이 없었다. 오히려 과거의 잘못된 행보가 드러났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