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동진(국악인) (문단 편집) == 생애 ==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 장기면[* 장기면은 현재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되어 [[장군면]]으로 변경되었다. 다만, 박동진의 출신지(무릉리)는 현재도 공주시에 무릉동으로 남아 있다.] 출신의 판소리 명창이다. 호는 인당(忍堂)이다. [[종교]]는 본래 무종교였으나 나중에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에 귀의하였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가 되었고, 1968년, 국악원장 성경린(成慶麟, 1911년~2008년)의 주선과 당시 각종 창극단에서 악사로 활동하던 한일섭(韓一燮, 1929년~1973년)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의 5시간 완창 발표를 가졌다. 이 발표회는 UN군 사령부 방송 VUNC를 통해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을 기점으로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5시간,《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등을 복원, 완창 발표를 가졌고,《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전면적인 활동에 나섰다.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판소리계에서 소리꾼의 능력을 보여주는 완창 발표회라는 걸 국내에서 정착시킨 게 바로 이 사람이다.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81년에 미국 일주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1982년에는 미국에서 《성서 판소리》를 발표하였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에 임명되었고,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고향]] 공주로 내려와 전수관을 개관하는 한편, 여전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감행하는 등 정렬적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7월 8일 공주 전수관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안타깝게도 87세 생일이 겨우 4일 앞이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공주시]]에서는 매년 그를 기리는 추모 음악회를 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